한국일보

공화당 발목 잡는 트럼프 이민정책

2018-06-21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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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도 결국 한 발 물러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린 아기까지 엄마에게서 떼어놓은 이른바 ‘무관용’ 밀입국 단속에 대한 비판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지자, 어제 국경에서의 가족격리 정책을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하루 이틀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난민 수용소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했던 그가 뒤늦게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수습에 나선 것이다.

지난 며칠 미 전국은 엄마아빠를 찾으며 우는 아기들, 철창에 갇힌 겁에 질린 아이들의 사진과 흐느낌으로 뒤덮인 듯 했다. 밀입국자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무관용 정책 시행으로 낯선 곳에서 부모와 격리당한 아이들의 애처로운 광경이 사진과 음성녹음을 통해 집중 보도되면서 미국인들은 경악했고, 분노했다.

미국의 가장 기본 가치관인 ‘가족’을 침해하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비도덕적인” 정부방침을 성토하는 거센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그동안 트럼프에게 닥쳤다 가라앉았던 몇 차례의 소용돌이와는 달리 이번 사태는 순식간에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비판은 트럼프시대엔 드물게 ‘초당적’이었다. 멜라니아여사를 비롯한 현·전 퍼스트레이디 5명이 한 목소리로 반대를 공개 표명했고, 양당 의원들과 양당 주지사들, 재계와 종교계가 평소 친 트럼프 입장을 접어두고 “수치스러운” 행위를 당장 멈추라고 촉구했으며, 영국·캐나다 정상과 함께 교황까지 비판에 가세했다.

미 의사협회도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아메리칸과 유나이티드 등 항공사들은 격리된 아이들 수송에 자사 항공기 이용을 삼가달라고 통보했다. 일반인들도 적극 나섰다. 울부짖는 두 살짜리 소녀의 작은 얼굴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페이스북을 통해 시작한 한 부부의 모금 캠페인엔 나흘만인 20일 오후 현재 22만여명이 참여해 모금액이 1,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트럼프 행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강행을 천명하며 격리정책은 민주당 탓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계속한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은 성경구절까지 인용해가며 무관용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가족격리 정책 존재 자체를 부인하던 커스텐 닐슨 국토안보부장관은 사실이 드러나자 “우리 할 일 한 것에 사과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모두 옹호하기 힘든 무자비한 정책을 옹호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아이를 떼어놓는 것은, 설사 그 부모가 밀입국자라해도, 법 시행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면 되는 사무적인 정책 이슈가 아니었다. 그건 TV 앵커도, 사진기자도, 보도에 앞서 한 어머니, 한 아버지로 눈물을 흘리게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본능적으로 가닿는 감정적 사안이었다. 이념과 종교와 인종을 초월해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나의 사회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이슈였다.

다급해진 것은 공화당이었다. 특히 넉 달 반 남은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사수해야할 연방하원 공화당의원들에겐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하원의 주도권이 좌우될 중간선거 격전지는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에 열광하는 트럼프랜드가 아니다. 이민자들이 많은 캘리포니아와 뉴욕, 뉴저지 등 20여개 선거구, 수천명 스윙보터에 의해 승패가 갈릴 의석들이다.

하원 공화당 지도부는 이번 주 이민법안 처리를 준비해왔다. 지금이 공화당 이민법안을 통과시키기엔 최선의 기회다. 선거에서 주도권을 상실하면 공화당안의 입법화는 물 건너갈 것이기 때문이다. 중도파를 설득해 보수-중도의 타협 성공으로 절충안도 마련했다. 절충안 통과도 확실한 것이 아니어서 지지표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와중에서 트럼프의 가족격리 ‘폭탄’이 터진 것이다.

부랴부랴 가족격리 중단 조항까지 첨부한 하원의 이민법안은 빠르면 오늘(21일) 표결에 회부될 것이다. 아직은 하원 통과도 확실치 않지만 상원 통과는 더욱 어둡다. 드리머 신분합법화는 들어있으나 트럼프의 장벽건설 기금과 가족이민 축소조항이 들어간 법안을 민주당이 일치단결해 반대하기 때문이다.


의사당에서 공화당 하원의원들과 회동했던 19일 밤까지도 가족격리 사태 해결책을 의회에 떠넘겼던 트럼프가 어떤 이유로 하루 만에 마음을 바꿨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거센 비판에 압도당했을 수도 있고 다시 긴 법정투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린자녀를 부모와 떼어놓는 국경의 ‘비극’은 다행히 중단되었다. 부모와 함께 구금될 전망인데 그 기간이 20일을 넘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또 선거 앞둔 공화당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것이다.

그런데, “왜?”라는 의문은 계속된다. 이처럼 극단적 정책이 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공화당에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았을 트럼프 백악관은 왜 이런 무모한 선택을 했을까.
세션스 법무와 백악관 수석정책 보좌관 스티븐 밀러가 주도한 이번 ‘무관용 정책’이 합법이민 축소 입법화를 위한 협상카드로 이용되었다는 뉴욕타임스의 분석이 설득력 있다.

이들이 오랫동안 주창해온 반이민 강경론은 그동안 공화당 주류에서 외면당하다가 이들이 트럼프 취임 후 권력의 핵심으로 이동하면서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워싱턴의 반이민 기수인 이들은 몇 년 전부터 국수주의자 스티브 배넌과 손잡고 표밭의 반이민 파워를 감지한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간택’했다는 분석도 이미 나왔었다)

예상보다 거센 비판에 이번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이들이 건재하는 한 노골적으로 합법이민까지 겨냥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은 또 다른 형태로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민사회가 단합하여 풀어야 할 중대하고 시급한 숙제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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