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11)제35대 John F. Kennedy 대통령 ③

2018-06-15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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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대통령제도하의 부통령이란 자리는 유사시 대통령을 승계한다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제외하고는 실로 별볼일이 없는 감투이다.

부통령은 외견상 여당의 No. 2 man 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책은 있을수도 없으며 항상 대통령의 정책을 충복처럼 지지해야 하며 자신의 목소리는 줄일수록 미덕으로 여겨지는 거북한 자리이다. 정당내의 중진중에서 너무 목소리가 요란하게 큰 사람을 부통령으로 만들어 버리는 수가 있는데 Theodore Roosevelt 의 시끄러운 큰 목소리가 그가 부통령이 되었던 이유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농담에 소학교 동창중 두명의 소식이 불분명한데 한사람은 sailor 가 된후에, 다른 한사람은 부통령이 된후에 소식들이 묘연해 졌다고 하는 우스개 소리이다.

대통령은 정책입안 과정에서 부통령과 상의를 잘 않하는 것이 통례인것도 같다.


예를 들어서 Truman 부통령은 FDR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에 승계 하였을때까지 원자탄이 완성되어 실전에 당장 쓰일수 있던것을 몰랐었다는 얘기가 있다. 부통령의 권위는 전적으로 대통령이 그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대통령에 따라서 어느 분야를 부통령에게 전담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부통령은 국무의 결제선상에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듯 하다. Johnson 처럼 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종전의 위계질서가 꺼꾸로 되게 되는 경우에는 처신하기도 매우 거북 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Johnson 을 JFK 의 잠재적인 정적으로 판단해오고 있었던 JFK 의 충실한 맹견이었던 동생 Robert Kennedy 는 Johnson 을 노골적으로 적대하고 때로는 고의적으로 푸대접 했었다고 한다.

“Texan 다웁게” John Wayne 같은 거구를 가졌던 백전노장이었던 노련한 Johnson 은 숫한 수모를 잘 참고 견디어 내었다.

0.3%의 득표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에 당선된 JFK

JFK가 Harvard 대학교를 졸업한 1940년은 Hitler 의 위협으로 유럽의 정세가 극도로 불안했었는데 그는 그해에 대학생 시절에 썼던 논문을 다시 정리하여 “Why England Slept” 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책에서 그는 영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Hitler 와 초장에 타협을 하여서 유럽의 평화를 위협한 괴물이 성장했다고 비난 하였 었다고 한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이던 1954년에 척추수술을 받아 6개월간 병상에 누어있던 동안에 “Profiles in Courage” 라는 용기있던 정치인들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는 이책으로 1957년에 자서전부문의 Pulitzer 상을 받았었다. 그의 집필력은 공인된 셈이었으나 JFK 의 비평자들은 그가 McCarthy 상원의원이 과도한 공산주의 타도를 외치며 난동을 부리고 있을때 비록 그가 병원에 입원중이기는 하였으나 그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을 빗대어 그의 “courage” 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 었다고 한다.

JFK 는 제2차 세계대전중 4년간 해군에 복무하던중 대위로써 해군 쾌속정 PT boat 의 함장으로 참전했다가 일본전투함이 그의 boat 를 드리받아 배가 두동강이가 났었는데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부하 해군들을 구출해내어 해군과 해병대의 훈장들을 받았었다고 한다. 근래의 징병기피 대통령들과는 격이 다른 무용담이다. PT boat 의 격침때 그가 척추를 부상당해 평생 고통을 받은것으로 널리 알려져 그의 전쟁영웅설을 부축이었으나 사실은 그가 대학생시절 football 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오래전부터 척추고통을 받아 왔었다고 한다. 물론 PT boat 의 격침때의 부상이 그의 척추건강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1960년의 대통령선거에 TV 가 본격적으로 이용되었었다. 미국의 정치가 TV democracy 가 되었다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Kennedy 와 Nixon 은 4회에 걸쳐 1시간짜리 토론을 하엿었다. 매회 7천만명의 미국인들이 경청하였었다는 이 토론들 에서 후보들은 첫번과 마지막회에서 8분씩 연설한것 이외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2.5분동안 답변하는 형식이었다. 후보들은 TV talent 처럼 분장도 하였을 것이고 예상질문에 답변연습도 많이 해가지고 나왔을 것이다. 물론 “연기”를 더 잘하는 사람이 유리하였겠지만 그런 것들이 과연 대통령의 자질을 시험하는 합당한 잣대인가 에 대해서 의문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 “TV show” 는 Kennedy 에게 훨씬 더 유리했었다고 한다.

Kennedy 는 더 젊고 잘 생기고 답변도 침착하고 재치있게 잘하였었다고 한다. 또한 JFK 는 답변에서 통계숫자를 잘 인용했었다는데 당시에는 요즈음 처럼 빠른 fact checking system 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이었다. Nixon 은 땀을 잘 흘리는 체질이었던 모양으로 뜨거운 TV 조명밑에서 땀을 자주 딱아대면 질문을 받고 쩔쩔매는것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을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얘기는 토론을 TV 로 본 사람들은 JFK 가 이겼다고 생각하였 었는데 radio 를 통해서 들은 사람들은 Nixon이 이겼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더 많았었다고도 한다.


토론회에서 JFK 는 공화당 치하의 미국은 경제가 침체되어서 GNP 가 별로 성장 하지 못하였고 불경기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정부는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과 청소년, 극빈자들과 소수민들을 도외시 하였으며 도시들은 빈민굴로 가득 찼으며 학교교육도 충실하지 못하였고 백악관에 있던 장군 (Ike 대통령)은 도리어 국방력을 약화 시켰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미국이 핵무기와 missile 개발에 쏘련보다 뒤져 있으며 다른 무장수준도 작은 전쟁에서 조차 이길수 없는 정도가 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미국이 약진을 해야만 할때가 되었다면서 그의 정책을 “New Frontier” (새로운 ‘개척’) 정책이라고 역설하였다.

Eisenhower 의 “업적”을 변호했어야만 했었던 Nixon 은 미국이 지난 8년간 모든 면에서 대단한 성과를 걷었었지만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더욱 잘될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Nixon 의 주장은 많은 청중들에게 “구태의연” 에 “구관이 명관이다” 라는 주장처럼 들렸을 것이다.

1960년의 대통령 선거결과는 1880년 대선 (James A. Garfield 대 Winfield S. Hancock 의 선거에서 2천표 미만의 득표차이, Garfield 대통령은 취임 6개월후에 암살되었음) 이후 가장 아슬아슬했던 것이었다고 한다. 어떤주에서 한표라도 더 많이 얻으면 그주 선거인단표를 몽땅 다 가져가도록 되어있는 선거인단 선출경쟁에서 JFK 는 303표를, Nixon 은 219표를 얻어서 얼핏 보기에는 JFK 가 압승한것처럼 보였지만 국민들의 실제 투표에서는 0.3% 의 차이밖에 없었었다고 한다.

그나마 2000년의 Bush 대 Gore 의 경쟁에서 실제 국민들의 투표 에서는 지고도 선건인단표에서 이김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George W. Bush 보다는 떳떳한 것이었지만 (미국역사상 같은 일이 다섯번 있었는데 Bush 가 네번째임) 개표하던날 모든 미국국민들이 잠을 설치고 손에 땀을 흘렸었을 것이다. 게다가 몇개주에서는 개표결과에 “충분한” 문제점들이 있어서 Nixon 이 선거결과 불복종 소송을 할수도 있었지만 Al Gore 가 그랬던것 처럼 Nixon 도 소송에서 야기될수밖에 없는 정국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개표결과에 승복 하였었다. 미국의 역사에도 현재의 Trump 대통령 같은 몇몇의 과격해 보이던 대통령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국의 정치인들은 극단적인 정치하한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는 본받을만한 아름다운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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