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싱가포르의 승자와 패자

2018-06-14 (목)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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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를 이처럼 진심으로 응원하는 날이 오다니…그날 저녁 상당수 한인들은 상상조차 안 했던 ‘드문 경험’을 공유했다. 그건 모든 정파와 이념을 넘어서는 평화를 향한 순수한 염원이었다. 6.25를 통해 무모한 전쟁 도발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파괴시키는가를 체험한 우리들에게 ‘한반도의 평화’는 그처럼 절체절명의 명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기대와 관심 속에 ‘역사적 첫 걸음’을 내딛었다. 70년의 적대관계를 끝내기 위해 마주 선 두 정상의 6월12일 싱가포르 회담은 성조기와 인공기의 숲을 배경으로 나눈 악수, 친밀한 산책, 일사천리로 진행된 회담과 오찬 등을 화려한 사진으로 남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막상 두 정상이 공동 서명한 합의문의 내용은, 한껏 높여졌던 기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위한 노력, 완전한 비핵화 노력, 미군 유해 송환 등 4개항의 합의문에는 미국이 그토록 강조해온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문구가 빠진 채 비핵화에 대한 어떤 구체적 내용도 들어 있지 않았다.


모호한 원칙 선언에 대한 아쉬움은 트럼프 대통령이 마치 트윗 날리듯 기자회견에서 던진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 발표로 실망을 넘어 충격으로 이어졌다.

세계를 주목시킨 역사적 상징성, 미흡한 합의문, 북한에게 준 깜짝 선물까지 얽히면서 회담 성과에 대한 평가는 며칠 째 엇갈리고 있다.

엄청난 성공인가, 거대한 실패인가 - 미국과 북한은 각기 원하는 것을 얻었는가, 이번 정상회담 성사로 세계는 보다 나아졌는가…이어지는 질문에 답하기는 보통사람들만이 아니라 전문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특이한 두 정상이 직접 개입해 ‘선 합의·후 협상’의 톱-다운 방식으로 시작한 협상이어서 더욱 그렇다.

가장 간단하고 객관적 평가 방법의 하나가 승자와 패자 가리기다. 워싱턴포스트와 복스, 타임 등 여러 미디어가 정리한 ‘싱가로프의 승자와 패자’ 리스트가 도움이 된다. 객관적 시각의 평가여서 흥미롭기도 하다.

모든 미디어가 꼽은 최대 승자는 김정은이다. 국제사회의 인정이라는 상징적 승리 뿐 아니라 아무 것도 내준 것 없이 트럼프의 구체적 양보까지 받아내며 실질적 승리를 거두었다.

자국민을 굶기고 학대하는 불량국가의 잔인한 독재자로 국제사회 왕따였던 그에겐 트럼프와의 회담 자체가 승리다. 지구 반 바퀴를 날아온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며 정상국가의 리더로 국제무대에 당당하게 데뷔하는 오랜 꿈을 이루었고, 끈질기게 요구해왔던 한미군사훈련 중단이라는 약속까지 덤으로 받은 것이다. 싱가포르 현지에선 록스타 같은 인기도 누렸다.

회담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것은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트럼프의 승패 평가는 엇갈린다. 전임 대통령들이 못 해낸 북미회담을 성사시키며 강력한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고, 세계를 전쟁의 벼랑 끝에서 구출해내며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받았다. 외교 관행을 깨고 자신의 스타일로 새로운 역사를 기록했으니 상징적 승리는 거두었다.


한편 김정은에게 국제사회 인정과 한미군사훈련 중단이라는 주요 양보를 해주고도 얻어낸 게 없다는 점에서 ‘실질적 승리’를 못 챙긴 패자의 명단에 올랐다.

트럼프의 폭풍 칭찬으로 “국민에게 사랑 받는” 훌륭한 지도자가 된 김정은의 북한에서 처형당하고 고문당한 북한 주민들도 확실한 ‘패자’로 꼽혔다.

또 하나의 패자는 사전 통보도 받지 못한 채 ‘대북 방어에서 보루와 같은’ 한미군사훈련 중단이라는 일방적 발표를 들어야 했던 한국이다. 한국정부는 문제 삼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게 대체적 시각인데, 앞으로 한국은 김정은과 트럼프의 브로맨스라는 새 현실에 고심하며 ‘한국 패싱’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싱가포르 합의가 핵전쟁 위험을 감소시키는 출발점인지, 혹은 과거 여러 차례 반복된 실패의 답습인지를 알기 까지는 몇 달 몇 년의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행히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의 속도를 낼 것이다. 싱가포르의 ‘외교 승리’를 십분 활용해야 할 중간선거도 얼마 안 남았고 러시아 스캔들 특검 수사로부터 관심을 돌려야 할 정치적 필요도 절박해서다.

대북 실무협상을 리드하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회담 직후 한국과 중국을 잇달아 방문했고 ‘디테일이 없다’는 비판 진화를 위해 ‘2년 반 내의 비핵화 주요 성과’라는 첫 타임테이블도 제시하는 등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꽃놀이처럼 화려했던 싱가포르 회담이 오래도록 ‘역사적 사건’으로 남을 것인가는 이제 시작된 폼페이오의 멀고 힘든 여정에 달려 있다.

아, 미국의 미디어들이 지나친 또 하나의 승자가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한반도의 전쟁을 우려했던 보통 한인들이다. 싱가포르 합의문이 상징에 그치지 않고 획기적 출발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이다.

나도 지난 며칠, 젊은 나이에 납치된 아버지와 그 남편의 빈자리 부담을 평생 져야했던 어머니 - 오래 전 고인이 된 내 부모님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김정은과 무대에 앉는 것이 3천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길이라면 난 그 무대에 기꺼이 앉을 것이다”라는 트럼프의 결심이 끝까지 변치 않기를 기대했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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