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이칼호 물 맑고 깨끗해 깊은 곳 해초까지 다 보여

2018-06-01 (금) 권태진/변호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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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행⑦

8월 11일 발이칼 호수(Lake Baikal)

열차정류장에 나오지 않은 앙드레 한 선교사가 호텔로 전화가 왔다. 정류장에 나오지 못한 것은 시간을 잘못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울란우데에서 열차시간 변경된 것을 카카오로 알리고 확인까지 했었는데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의 여행일정에는 한국선교사들을 만나보는 것도 중요한 일정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이야기도 듣고 동시에 안내의 도움도 받기 위해서다. 다음날 안내는 이미 호텔에서 현지인 러시인과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바이칼호로 함께 가도록 약속을 했다.

앙드레 한 선교사는 우수리스크 시 전영수선교사 사역지에서 만난 황찬일 선교사로부터 소개 받았다. 이르쿠츠크에서 17년째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인, 고려인, 조선족 등에게 선교를 하며 특히 이르쿠츠크 공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은행에서 푸로그램머로 일하는 고려인 부인과 사이에 어린 두 자녀가 있다.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있던 대학시절부터 대학성경선교회 (유비에프, University Bible Fellowship)가입하였으며 선교회의 일원으로 선교에 띠어들었다. 유비에프는 1961년 이창우 목사와 한국에 와있던 미 장로교선교사 Sarah Barry공동으로 설립한 대학생 성경그룹이다. 전남광주에서 시작했으나 현재 본부는 시카고에 있으며 자비량으로 해외에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있다.

아침 8시에 호텔에 도착한 한 선교사의 차로 70킬로미터 떨어진 바이칼 호 입구이며 하류에 있는 Listvyanka 마을로 향했다. 도중에 Yodarma 지역에 들려 시베리아 원주민의 유적과 시베리아 정복자 코삭크 부대의 박물관에 들렸다. 그들의 생활상황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의 생활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시베리아에 여러 원주민들이 있으며 울란우데에서 만난 부럇트인들도 시베리아 원주민에 속한다. 이들 원주민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안과 유전적으로 관계가 있다. 시베리아와 알라스카가 빙하로 연결되었을 당시에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이 미 대륙으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경이었다. 푸른 물 색깔이 호수를 아름답게 하고 있다. 앙가라강 물이 들어오는 호수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거대한 호수의 입구를 살펴보았다. 바이칼 호는 세계에서 민물량이 가장 많은 호수다. 길이 636킬로미터 (395마일) 넓이는 20킬로에서 80킬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1,700미터나 된다. 세계의 얼지 않은 민물의 20%에 해당된다. 1,700 가지의 나무와 동물이 있으며 그 중 3분의 2는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것들이다. 유네스코세계유산지의 하나다.

차를 주차한 후 쾌속보트를 타기로 했다. 30분 동안 미화로 $40불 정도다. 보트가 질주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보트를 세우고 호수 속을 보라고 했다. 물이 깨끗하여 깊은 물속에 해초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보트에서 내린 후 케이블카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 호수를 내려다 보았다. 걸어서 내려 오면서 맑은 공기와 주위의 자연을 구경하면서 내려온 25분 정도의 시간도 유쾌한 산택이었다.

호수가에 관광객을 유치하는 건생선시장 식당등으로 작은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에 들려 바이칼호의 가장 유명한 생선으로 모양과 맛이 조기와 비슷한 Omur, 부럇트 사람들이 좋아하는 양고기 그리고 복음밥으로 점심을 즐겼다. 마을 끝으로 차를 몰고 올라가니 호텔이 있어 그곳에 들려 커피를 앞에 놓고 탁 트인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내려오면서 호수 입구에 있는 식물과 어류박물관에 들렸다.

이곳은 여행객들의 인기 있는 방문처다. 박물관에서 잠수함 포탈을 통하여 마치 잠수함을 타고 바다에 진입하는 것같이 25분의 짧은 기간에 바다의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특히 가장 깊은 1,637미터의 깊은 곳까지의 모습을 볼수 있다. 바이칼 호 관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 중에 바이칼 호 주위의 일부를 도는 Circum-Baikal 열차 여행과 호수 안에 있는 여러 섬 중에서 가장 큰 Okhon Island 섬의 방문이 포함된다. 열차를 타고 가장 아름다운 호수지역을 볼 수 있으며 호수에 있는 27개 섬중에서 길이가 72킬로나 되는 가장 큰 섬인 Okhon 섬에서는 각종의 행사들이 있지만 특히 토속미신 행사가 유명하여 세계 무당대회가 열리기도 하는 곳이다. 나는 시간 관계로 이 두 곳을 모두 가지 못했던 것은 유감이었다.

다시 이르쿠츠크로 ...유배자박물관

이르쿠츠크 시내로 들어와 곧 바로 이곳에 강제노동으로 유배되었던 사람들의 생활을 담은 박물관을 향했다. 1825년 12월 4일 있었던 디까브리스트(Decembrists) 봉기의 주역이였던 사람들이 유배시절 지냈던 집이 박물관이다. 12월 봉기는 젊은 귀족출신 군 장교들이 왕의 첫 서열인 알렉산더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하자 그의 동생 니콜라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황제에 대한 불복하여 일으킨 실패한 봉기다. 귀족계급출신들과 그들을 따르던 3000명의 남자들이 참여한 궐기로 주동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봉기 1년 안에 주동자였던 Volkonsky와 Trubetskoi 등 120여명의 엘리트귀족들이 시베리아 광산으로 향하였다.


먼저 시내 중심부에 있는 Volkonsky Manor House에 도착했다. 공작 작위를 가졌으며 군 소장이였던 Sergei Volkonsky가 직접 건축한 페인트를 칠한 2층 목조 건물로 당시 사교의 중심지였으며 이르쿠츠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였다. 넓은 정원에는 여려가지 꽃들이 피고 있었다. 12월 봉기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그는 유배된 기간 동안 농부들과 어울리며 개량된 농업기술을 가르쳤다. 그의 부인 Maria Volkonsky 는 남편과 가까이 있기 위해 남편이 중노동하는 광산촌 부근의 한 오두막집에서 28년을 지낸 후 새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그녀는 부랴트 원주민의 언어도 배우며 그들과 접촉을 하고 집에서 가져온 피라밑형의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피라밑처럼 되어 있어 피라밑 피아노라 부르는 피아노가 아직 집에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에 간 곳이 Trubetskoy Manor로 Vokonsky Manor에서 멀지 않는 이웃에 있다. Volkonsky의 집은 귀족형의 모습이었지만 Trubetkoy의 집은 시베리아에 유배된 모든 12월 봉기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념박물관 안에는 그녀의 물품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다른 유배자들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1845년 Trubetskoy 부부는 20년 만에 광산촌에서 Irkutsk로 이주 허가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세를 얻어 생활하다가 1854년에 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 집을 짓는 계획에 행복해했던 부인은 불행하게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유배자들의 여인들

“당신의 운명이 어떤 것일지라도 나는 세상의 끝인 시베리아로 가겠습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에 대해 한 순간도 의심해 본적이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세르게이 만약 당신이 판결이 그곳에 남게 한다면 저는 당신과 감옥일지라도 그곳을 공유하겠습니다.” 1826년 3월3일 세르게이 발콘스키가 처음 체포된 이후 부인 마리야가 보낸 편지. 러시아의 제 1의 시인 푸시킨은 그녀를 추모하여 비에 비문을 썼다.

유배자들의 부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인은 Sergei Volkonsky 공작 부인 Maria Volkonsky와 Sergey Trubetskoy 공작 부인 Yakaterina Trubetskoy 두 부인이다. 이들의 남편들은 봉기의 주동자로 제 1진으로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그들의 호화로운 귀족의 신분의 생활을 포기하고 남편들을 따라 험한 길을 택했다. 이들의 남편들을 따르는 행위는 우상화된 소련여인상의 심벌이 되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며 수용소에 있기 때문에 여자들은 켐프부근에서 살아야했으며 Irkutsk에서 살게 된 것은 15년 후였다.

러시아정부는 유배자들을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남편들을 따라가지 않는 여인들은 과부로 인정하고 이혼하지 않고도 다시 결혼하도록 허용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남자를 따라가는 여자들은 자녀들을 대리고 갈수 없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도 유럽지역 소련땅에는 올 수 없도록 했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가더라도 일주일에 관리의 입회아래 일주에 2번만 면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돈과 귀중품도 몰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Yekaterina와 Maria는 이것을 거부했으며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Sergey Trubetskoy는 1826년 7월 23일 밤 12월봉기 추방자들의 제 1진으로 시베리아로 향했다. 그 다음날 그의 부인 Yakaterina도 Irkutsk로 향했다.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6천 킬로미터에 가까운 먼 거리를 가면서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또 언 강을 건너다가 마차가 부서지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남편에 대한 결심을 꺽을 수 없었다. Irkutsk에 도착했어도 관리들이 그녀의 마음을 돌리도록 회유를 하고 9개월 간을 억류했으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베리아를 오는 도중에 만난 마리아와 함께 작은 집을 얻어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집이 너무 추워서 방안의 벽에 서리가 얼어 그들의 머리가 침대에 붙은 적이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한 선교사는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새로운 명소인 120가로 안내했다. 여러 특유의 건물양식에 현대식 상점들과 수퍼마켓이 들어서 있어 인기 있는 곳이다. 이곳 수퍼마켓에서 이은미선교사를 만났다. 한국에서 온 대학생선교팀들과 함께 수퍼마켓에 들린 차였다. 예수전도단 출신으로 미혼으로 이곳에 12년째 대학생을 상대로 선교를 하고 있으며 현제 이르쿠츠크농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돈을 내 줄 테니 필요한 식품을 사도록 권했지만 사양하기에 다시 권했더니 조금만 집었다. 개인의 이익은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 선교의 열정이 대단하지만 동시에 용기도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권태진/변호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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