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해리 왕자와 마클의 결혼

2018-05-23 (수)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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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레이디로 8년간의 백악관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기자 질문에 낸시 레이건은 “찰스왕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초대 받은 것”이라고 대답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영국 왕자들의 결혼식은 그만큼 화려하고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영국국왕의 결혼식이 초라하게 치러진 적도 있다. 에드워드 8세의 결혼식이다. 하객이 16명밖에 없었고 영국왕실에서 왕족들이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유는? 신부가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이혼녀라는 것이다. 그녀가 바로 유명한 미국인 심프슨 부인이다.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이 없이는 국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불가능 합니다”라고 대국민 방송을 한 후 하야, 프랑스의 투르 근교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신랑가족이 한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심프슨 부인은 왕실의 이같은 조치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고 파란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심프슨 블루’라는 단어가 이래서 생겨났다. 신부는 흰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영국왕실의 전통에 정면 도전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에드워드 8세의 동생 조지 6세가 갑자기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며 그의 맏딸이 현재의 영국국왕 엘리자베스 2세다. 그러니까 심프슨 부인 재혼파동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탄생한 셈이다. 그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난 주 자신의 손자 해리 왕자가 이혼한 경력이 있는 할리웃 스타 메건 마클과의 결혼을 승낙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국왕족은 왕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도록 왕실규범에 못 박혀 있다.

마클은 재혼 정도가 아니다. 어머니가 흑인이다. 영국왕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해리 왕자와 미국인 마클의 결혼식을 보면서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정말 세상이 변했구나”하는 현장목격의 입체감이다. 찰스 왕세자와 사돈인 마클의 흑인 어머니 도리아 레이글랜드가 손을 잡고 서있으니 말이다.

나의 아들이 이혼한 혼혈 흑인여성을 데리고 온다면 이들의 결혼을 내가 승낙할 수 있을까. 자신 없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리 왕자가 흑인혼혈아 출신과 결혼하는 것을 어떻게 승낙하게 되었을까. 다이애나비 사건 때는 여왕이 민심을 읽지 못하고 국민들과 반대방향으로 달려 왕실폐지론까지 등장 했었다. 여왕은 다이애나비 사건에서 크게 뉘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여왕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고 한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왕실존립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이번 해리 왕자와 마클의 결혼식을 국민들이 찬성하는 것을 보고는 두말없이 승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7세의 마클은 LA 출신이다. 어머니는 요가선생이다. 이혼한 아버지는 할리웃 촬영감독 출신으로 멕시코에서 살고 있다. 마클은 TV 연속극 ‘수츠’에서 레이철 제인 역을 맡아왔는데 해리왕자가 이 연속극을 보고 그녀에게 반해 친구들이 다리를 놓아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결혼식에서 성공회의 흑인주교 마이클 커리 신부가 설교를 한 것도 파격적이다. 커리 신부는 “사랑의 힘이 옛 세상을 새 세상으로 만들고 있다”며 사랑이 지극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영국가수 제니퍼 러쉬가 불러 유명해진 ‘Power of Love‘를 해리 왕자와 마클이 실현해 보인 셈이다. 세기의 로맨스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 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한때의 마주침에 불과한 것이다. 에드워드 8세는 이혼녀와 결혼해 왕위까지 내놓았지만 80여년 후 해리 왕자는 온 국민의 축복 속에 이혼녀와 결혼식을 올린 것은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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