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과하지 않는 트럼프 백악관

2018-05-17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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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문 지휘 논란으로 진통을 겪었던 지나 해스펠 CIA 국장 내정자 인준안이 어제 상원 정보위에서 10대5로 통과되었다. 이르면 오늘, 늦어도 다음 주엔 실시될 상원 전체회의 표결이 남았지만 힘든 문턱을 넘었으니 인준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또 하나 ‘승리’다.

그러나 인준지원 과정에서 불거진 백악관 발(發) ‘매케인 조롱’ 파문은 ‘품위 추락’에서 ‘누설 심화’, ‘사과 실종’으로 계속 백악관의 바닥을 드러내며 트럼프 승리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논란의 발단은 지난주 10일 오전 백악관 공보팀의 한 회의였다. 곤욕을 치르는 해스펠 지원방안을 논의하면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강력 반대가 거론되었다. 그러자 켈리 새들러라는 한 여성 보좌관이 말했다 : “문제될 것 없다…그는 어차피 죽어가고 있다”


트럼프와 매케인의 껄끄러운 사이는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월남전 당시 5년간 포로로 고문당했던 후유증으로 아직도 팔이 불편한 81세 6선 의원 매케인은 현재 뇌암 투병 중이며 ‘불굴의 전쟁영웅’으로, 소신과 품위 갖춘 ‘뚝심 있는 중도파’로 존경받아온 공화당의 원로다.

평생을 공직에 몸담아온 매케인에겐 물론이고,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조차 내던진 ‘잔인한’ 조롱은 트럼프 백악관의 기준에서도 그 정도가 지나쳤다. 참석자 모두가 놀라, 순간 회의실엔 불편한 정적이 감돌았다고 한다.

같은 날 오후 5시경 온라인 매체 ‘더 힐’에 첫 보도된 새들러의 발언은 미디어들의 잇단 보도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케이블TV의 핫뉴스로 떠올랐다. 공화당을 포함한 연방의원들은 물론이고 언론과 여론의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그날은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석방된 한국계 미국인 3명이 미국에 도착한 날이었다. 새벽 2시에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그들을 맞아 역사적인 한 장면을 연출한 트럼프 대통령이 독차지해야 했을 뉴스의 조명을 매케인 조롱이 상당부분 가로챈 셈이었다.

백악관 공보팀 책임자들이 즉각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더라면 새들러의 막말은 일회성 뉴스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트럼프 백악관’답게 대응했다.

무례하고 부적절한 발언 자체는 접어두고 백악관 정보 누설 이슈로 몰아갔다. 사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내부 사안’임을 강조했다.

하긴 백악관의 정보 누설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사태와 관련한 악시오스의 보도가 흥미롭다 : 10일의 회의엔 참석 안했던 새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이 11일 소집한 대책회의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한 말들도 누설되겠지…정말 역겹다” 샌더스의 예측은 맞았다. 얼마 안 되어 ABC뉴스는 5명 누설자들의 제보로 그 회의 내용을 보도했다.


유난히 권력암투가 심한 트럼프 백악관의 누설 사태는 어제오늘일이 아니어서 나름 대처도 상당히 강경하다. 금년 1월부터는 대통령과 참모진의 집무공간인 ‘웨스트 윙’ 내에선 개인의 셀폰 휴대가 금지되고 있다. 입구의 라커 안에 셀폰을 넣어두고 들어가야 한다. 탐지기를 든 조사원들이 무작위 체크도 실시한다. 웨스트 윙을 방문했던 한 의원의 삼성 갤럭시 셀폰이 탐지기에 적발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처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은 이번 사태로도 증명되었다. 상당수 참모들이 누설 의심자로 쫓겨나기까지 했는데 왜 갈수록 심해지는 것일까. 참모들 간의 개인적 앙심, 정책논쟁에서 유리한 입지 확보, 지나친 내부 알력으로 인한 불안감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현 백악관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누설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폴리티코는 분석했다.

주말 내내 사방에서 뭇매를 맞고 난 후 이번 주 들어 14일, 트럼프 대통령은 매케인 조롱의 파문을 ‘누설’ 이슈로 진화하는데 앞장섰다. 이번 파문이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가짜뉴스 미디어들의 과장이라고 일축하면서도 “배반자이고 겁쟁이”인 누설자들을 색출할 것이라고 트윗을 통해 엄포를 놓았다.

같은 날 기자회견을 가진 백악관 부대변인 라즈 샤도 문제는 누설이라고 강조하면서 새들러에 대한 조치와 사과에 대한 질문에는 ‘내부사안’이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아마도 그는 지난 2월 자신의 ‘실수’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 가정폭력에 얽힌 보좌관 롭 포터 스캔들이 번졌을 때 백악관의 미숙한 대응을 인정하는 샤의 기자회견을 시청한 트럼프는 몹시 화를 내며 다시는 그러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한 백악관 관리의 누설로 밝혀진 뒷이야기다.

결국 백악관은 매케인 조롱에 대해 공개 사과를 안 한 채 한 주를 넘기고 있다. 발언 당사자인 새들러는 매케인의 딸에게 전화로 사과하며 공개사과도 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안 하고 있다. 백악관이 불허했다는 루머도 떠돈다.

어쩌면 트럼프 백악관에게 사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멕시칸 이민자를 ‘강간범’으로 매도한 대선후보 시절부터 취임 후 ‘시궁창 국가들’, 반 무슬림 동영상 리트윗, 백인우월주의자들 중에 ‘매우 좋은 사람들도 있다’…길지 않은 정치생활에서 상대를 모욕하는 수많은 부적절한 언행을 거듭하고도 ‘사과’란 걸 하지 않은 대통령이 트럼프다.

막말과 인신공격 모욕을 솔선수범하면서, 참모들의 알력이 빚어내는 ‘혼란’을 즐기고, ‘패배를 인정하는’ 사과는 결코 하지 않는다는 트럼프의 백악관…“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쳐 그들이 각자 인생의 여정에서 최선이 되도록 하자”는 취지로 지난 주 시작한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의 캠페인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할 듯싶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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