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도박’

2018-05-10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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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의 스피치는 미국이 주도한 하나의 ‘역사적’ 핵합의 파기와 또 하나의 ‘역사적’ 핵합의 임박을 동시에 알리며 짤막하게 끝났다. 그러나 그 파장은 길게, 거세게 계속되고 있다.

8일 백악관 기자회견을 통해 트럼프는 이란 핵협정 탈퇴를 공식 선언한 후 북한 비핵화를 위한 미북 정상회담 준비차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평양으로 날아가고 있다면서 낙관을 감추지 않았다. “계획이 세워지고 관계가 구축되고 있다. 희망컨대 협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란과 북한의 핵협상은 별도 사안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두 나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연계되어 있다 : 핵을 개발해온 테러지원 ‘악의 축’이다. 두 협상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은 다르지만 둘 다 ‘거래’의 기본은 같다. 비핵화를 전제로 한 경제제재 해제다. 가장 위험한 국가들의 가장 위험한 무기 보유를 막아 미국의 안보와 세계평화를 유지한다는 궁극적 목적도 같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달라, 하나는 파기하고 하나는 새로 체결하려는 것일까. 한마디로 정답은 “버락 오바마”라고 대통령역사학자 더글러스 브링클리 라이스대 교수는 지적한다. 하긴 “오바마의 업적은 무엇이든 파기하려는” 트럼프의 집념은 취임 며칠 후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TPP) 탈퇴에서 시작되어 파리기후협약 탈퇴, 한미자유무역협정 재협상 등 국제정책과 오바마케어·다카 폐지 등 국내정책을 아우르며 전방위로 과시되어 왔다.

2015년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의 안보리 5개국에 독일을 더한 6개국과 이란이 공동 서명한 이란 핵협정에서의 미국 탈퇴는 중동정세와 세계평화, 유럽 우방국들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지금까지 트럼프의 어떤 ‘오바마 지우기’보다 파장이 클 중대 사안이다.

“애초 체결되지 말았어야할 끔찍하고 일방적인 협상”이라는 트럼프의 주장에 대한 지지 보이스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핵심부터 결함이 있는’ 협정으로 오바마가 초당적 지지를 얻어낼 자신이 없어 아예 의회 제출을 포기, ‘조약’ 비준을 못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보수진영은 트럼프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란과 대립하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도 전폭적 지지를 표했다.

미국의 신뢰도 약화와 국제정세 불안, 우방국들과의 갈등은 반대자들의 공통적 우려다. 지금까지 미 최악의 외교정책으로 꼽히는 이라크 침공을 능가하는 최악이라는 비판과 함께 외교정책이 아닌 ‘밴달리즘’이라는 혹평도 나왔다.

미국의 신뢰도 추락을 우려한 USA 투데이는 쉽게 비유했다. “만약 보통사람이 트럼프 대통령처럼…변덕스럽게 행동했다고 상상해보라. 자동차를 샀다가 색깔이나 마일리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매매계약서를 찢어버리고 나머지 페이먼트를 안 한다면 그는 그 크레딧으로 다른 차를 살 수 있겠는가” - 북핵협상 등 아직 사야할 ‘차’가 많은 미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다.

오바마 지우기는 강행하면서 대안 마련엔 소홀해온 트럼프의 습관은 이번에도 여전한 듯 보인다. 그는 이란 핵협정에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폐기내용이 없고 10~15년 후엔 핵개발을 막을 수 없는 시한적 협정인데다 그 협정조차 이란이 수차례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국방장관을 비롯한 국제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이란 핵협정은 지금까지 위반 없이 이행되어온 상태다.

파기의 구체적 근거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트럼프의 탈퇴결정을, 그래서 상당수 전문가들은 ‘도박’이라고 표현한다. 월스트릿저널은 현실이 아닌 트럼프의 희망사항을 근거로 승리를 기대하는 트럼프 집권이후 ‘최대의 도박’으로 진단했다.


탈퇴 선언에 따른 이슈는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 더 강력한 비핵화를 못 박는 이란과의 재협상은 가능한가. 유럽 우방들은 미국의 경제제재 개개에 합류할 것인가. 체결 후 불과 3년만의 합의 파기는 북한과의 핵협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트럼프는 우방들이 합세하는 경제제재 전면 복원으로 궁지에 몰리면 이란이 재협상 테이블로 나올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러나 아직 현실은 다르다. 이란은 재협상 불가를 천명하며 핵개발 재개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트럼프는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분노한 이란국민들에 의한 정권교체를 희망하겠지만 반대로 현 정권을 중심으로 집결하면서 반미정서가 거세게 휘몰아칠 위험도 크다.

경제제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우방들의 합류가 절대 필요하지만 우방들도 아직은 ‘미국 없는’ 협정 유지를 고수하고 있다. 미국이 이란과 무역하는 우방들에게 부차적 제재를 가한다면 자칫 이란 아닌 미국이 소외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가장 직접적 영향이 예상되는 것은 북핵협상이다. 트럼프와 그의 강경파 안보팀은 이번 탈퇴선언이 북한에게 미흡한 비핵화는 ‘수용 불가’라는 확실한 교훈을 주었을 것으로 자신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미국을 신뢰할 수 없어 “트럼프와의 합의 효과에 회의를 가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가 우려하는 현실이다.

트럼프의 ‘이란 핵협정 탈퇴’라는 정책의 성패를 지금 예단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의 결정 근거가 치밀한 전략보다는 희망사항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탈퇴에 따른 사안 하나하나가 이길 수도 있지만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위험 또한 상당히 높은 도박이라는 뜻이다. 우리로선 그중, ‘북핵협상 영향’ 한 가지만이라도 트럼프의 희망사항이 실현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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