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시리아 늪’

2018-04-12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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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또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에게 ‘시리아의 비극’은 더 이상 먼 나라 남의 일이 아니었다. 2015년 초가을 터키 해안으로 떠밀려 온 빨간 셔츠·파란 반바지의 3살짜리 난민의 작은 시체, 다음해 여름 폭격현장에서 구조된 5살 소년의 허연 먼지와 붉은 피로 뒤범벅된 무표정한 얼굴…전쟁에 희생된 아이들의 그 참혹함을 잊어가던 세계에 이번엔 독가스 중독으로 축 늘어진 어린 아기의 작은 몸이 다가왔다.

지난 주말 내전 중인 시리아의 반군 거점인 두마에서 자행된 화학무기 공격의 피해는 참담했다.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포함해 40~100명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노한 세계는 자국민 대량살상을 멈추지 않는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을 비난하며 책임을 묻고 있지만 아사드와 그의 지원국인 러시아 및 이란은 계속 공격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야만적인’ ‘짐승’의 ‘끔찍한’ ‘잔혹행위’라는 극단적 표현을 동원해가며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강력한 응징을 천명했다.


세계의 분노와 충격은 정당하지만, 미국으로선 이번 만행을 응징하기도, 앞으로의 만행을 저지하기도, 트럼프의 트윗 경고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지난해 말 “대통령으로 내가 직면했던 가장 어려운 이슈의 하나”라고 털어놓았던 시리아 내전은 7년을 끌면서 당시 존 브레넌 CIA국장의 표현대로 “가장 복잡하고 복합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어 왔다.

오바마 행정부는 가능한 한 개입을 피해왔고 이 같은 ‘소극적’ 오바마 정책을 비난해온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직후인 지난해 4월 아사드 정부군의 화학무기 공격으로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시리아 공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그러나 1회성 응징으로 향후 화학무기 사용을 저지하기 위한 경고였던 이 ‘제한적’ 공격은 실제로 큰 피해도 못 가했고,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 이번에 재연된 만행으로 증명되었다.

시리아 내전은 왜 미국의 문제가 되었는가, 미국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려면 시리아 내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온라인 정치해설 사이트 ‘복스’는 긴 해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2011년 중동 독재자들에게 항거하는 ‘아랍의 봄’ 물결에 실려 시리아인들이 거리로 나섰을 때 아사드 대통령은 1970년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아버지 하피즈의 방식대로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국민 지지율이 30%로 실권 위기에 처한 아사드의 목표는 반정부 시위를 내전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정부의 무력진압에 학살당하던 시위군중들이 무기를 들고 반군이 조직되면서, 정치투쟁을 군사적 대치로 바꾸려는 아사드의 ‘전략’은 성공했고 아사드는 적들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는, 자신이 원해온 전쟁을 갖게 되었다.

이슬람 수니파가 국민의 70%인 시리아에서 14.5%에 불과한 시아파에 속하는 아사드가 정권장악을 위해 벌인 ‘전쟁’은 그러나, 내전으로 머물지 않았다. 사우디와 카타르 등 수니파 중동 강대국들이 반군지원에 나서고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 함께 시리아에 중요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진 러시아가 아사드의 원군으로 뛰어들면서 2015년 무렵부터 시리아 사태는 ‘내전’을 넘어 강대국들의 대리전인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중동에서의 이란과 러시아의 야망을 좌시할 수 없는 미국에게도 이 전쟁은 발 빼기 힘든 당면과제가 되었다. 반군조직이 커지면서 그 그늘에서 형성된 테러그룹 척결이 미국에겐 또 하나 우선과제였다.

“내전의 확대를 방치해 대량학살을 막지 못한 것이 오바마 ‘최악의 실수’로 꼽히지만 그에 앞서 오바마의 진짜 실수는 시리아 정세와 주변강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오판이었다”고 전 국무부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은 지난해 지적했다. 반정부 시위가 성공해 아사드 정권이 무너질 것으로 확신했고 냉전시대 영향력 회복의 야망을 가진 러시아에게 시리아가 얼마나 중요한 전략지인가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2013년 여름 아사드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 오바마 자신이 경고한 ‘금지선’을 넘었을 때 군사적 응징을 결정했던 오바마는 예상치 못했던 러시아의 중재로 시리아와 화학무기 전량 폐기를 합의하고 정면충돌을 피해갔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확한 분석 없이는 좋은 정책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힐의 지적처럼 “정세를 오판하고 적절한 시기에 강력한 대응을 못한” 오바마는 50만명의 사망자와 수백만명의 난민을 만들고도 끝이 안 보이는 시리아 내전을 남겨둔 채 백악관을 떠났다.

오바마의 시리아 정책을 비판하며 강력한 응징을 천명하고는 있지만 트럼프에게도 명쾌한 해답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대응 옵션은 이미 비효과적으로 판명된 제한적 군사 공격과 반군지원, 그리고 자칫 아무도 원치 않는 전면전으로 확대할 위험이 높은 대규모 군사공격이다.

이 같은 미국의 딜레마를 ‘3가지 나쁜 시리아 옵션’으로 표현한 뉴욕타임스는 “아사드의 행동은 혐오스럽다. 그러나 시리아 정부를 붕괴시키고 내전을 확대시키기 원치 않는 한 실용적인 군사옵션은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마지막까지 전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던 ‘오바마의 시리아 늪’이 이젠 현 대통령이 발을 뺄 수도, 더 깊이 담글 수도 없는 ‘트럼프의 늪’이 되어가고 있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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