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넌 해고야”- 렉시트의 파장(波長)

2018-03-15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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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통령 승계 서열 4위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보스와의 불화 끝에 굴욕적으로 퇴출당했다. “넌 해고야”식의 무례하고 무자비한,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트윗 해고’였다.

방식은 황당했지만 렉스의 퇴장 ‘렉시트’ 자체가 놀랄만한 ‘전격적’ 조치는 아니다. 후임자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된 해임설은 지난 가을부터 파다했다. 트럼프의 국무장관 교체에 대해서도 ‘필연적 결과’에서 일단은 ‘옳은 결정’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트럼프의 틸러슨 국무장관 간택은 출발부터 ‘실패할 결혼’이었다. 거대 석유기업 엑손모빌 최고 경영자 출신의 틸러슨은 트럼프 내각의 과시용 훈장 같은 존재였다. “업계 최고의 인재를 공복으로 불러 오겠다”는 트럼프 장담의 산 증거이기도 했고 품위 있는 은발에 고급 양복이 어울리는 당당한 풍채가 외모를 중요시하는 대통령의 최고위 관료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친 러시아 성향의 억만장자 기업가라는 표면적인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LA타임스의 표현대로 ‘도널드 트럼프의 세계’의 조지 부시 공화당원인 틸러슨은 대통령 트럼프가 후보 트럼프와 달리 전통적 공화당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었으나 그런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틸러슨의 외적인 조건에 끌려 외교적 시각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채용했던 트럼프는 그를 ‘유약하고 소심한’ 전통주의자로 낙인찍으며 경멸하기 시작했다.

주요 외교 현안에서 강경파 보스와 실용적인 최고 참모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트럼프가 탈퇴를 선언한 파리기후협정, 파기를 다짐한 이란 핵협상을 틸러슨은 유지를 주장하며 맞섰고, 북한과의 협상을 추진하는 국무장관을 대통령은 ‘꼬마 로켓맨’과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는 트윗을 날리며 공개적으로 조롱했다.(그러나 정작 정상회담 수락이라는 결정적 대북협상 진전은 틸러슨이 완전 소외된 채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기업가적 접근으로 방만한 국무부 조직 재정비에 돌입했던 틸러슨은 보스로서의 장악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대규모 예산 삭감을 묵인하면서 뒤숭숭해진 스탭들의 사퇴가 줄을 이었고 주요 요직 상당수가 공석으로 남겨졌으며 장관과 대통령의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국무부의 위상도 약화되었다. 국무장관을 미국의 외교정책 대변인으로 보지 않는 해외의 불신이 가시화되었고 국무부의 사기저하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트럼프가 참모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충성심’이었지만 틸러슨은 그런 의미에서 한 번도 트럼프의 사람인 적이 없었다.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자 옹호발언이나 대 러시아 우호적 태도로 비난 대상이 될 때 틸러슨은 인종주의와 러시아에 강경 입장을 공언하며 독자적 노선을 택했다. 결정적으로 트럼프의 분노를 산 것은 지난해 가을 그가 한 모임에서 트럼프를 ‘멍청이(moron)’라고 부른 사실이 보도되어 일대 파문을 일으켰을 때였다. 트럼프가 부인 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하자 성명은 발표했으나 끝내 부인은 하지 않았다.

늘 위태롭고 불편해 보였던 트럼프와의 ‘결혼’은 결국 굴욕적인 트윗 해고로 끝났고 “평사원에서 최고경영자로 성공한 기업가, 헌신적인 보이스카웃 후원자”의 명성을 누릴 수 있었던 틸러슨은 “대통령과 불화하고 조직의 사기를 저하시킨 허약하고 비효율적인 국무장관”이라는 초라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새 국무장관으로 지명된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트럼프가 “나와 주파수가 딱 맞는다”고 감탄할 만큼 대통령의 신뢰와 호의와 존중을 확보하고 있는 ‘트럼프의 복심’으로 통한다. 티파티 물결에 편승해 워싱턴에 입성한 그는 오바마의 이란핵협상을 앞장 서 반대했으며 벵가지사태 하원청문회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사납게 몰아세워 뉴스의 조명을 받았다.


CIA국장 후보 인터뷰를 한 트럼프가 대기하던 다른 8명 후보 인터뷰를 다 취소시켰을 정도로 처음부터 트럼프와 코드가 잘 맞았던 그는 트럼프의 충동적 강경책을 사사건건 가로막았던 틸러슨과는 대조적으로 북한과 이란을 비롯한 외교정책만이 아니라 국내사안에서도 트럼프의 매파 본능을 공유한다.

일단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영향력 있는 국무장관으로 출발할 폼페이오이지만 성공여부를 예상하기는 아직 이르다. 극심하게 당파적이며 트럼프 못지않은 강경 매파이지만 그는 아직도 표밭 관리를 계속하고 있는 야심 많은 54세의 정치가다.

안보와 경제 라인을 강경파로 갈아치우며 “이제 내가 원하는 내각을 거의 갖추었다”는 트럼프의 본격적인 ‘미국 우선’ 정책 수립을 ‘외교 수장’ 폼페이오가 어디까지 맹종할 수 있을까. ‘비효율적 중도파’이긴 했어도 트럼프의 충동적 본능을 제어해온 틸러슨의 견제 역할을 인정하는 일각에선 반대로 폼페이오가 ‘예스맨’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의 여파를 우려한다.

취임 후 폼페이오의 첫 도전이 될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에 대한 영향을 가늠하는 시각도 엇갈린다. 일사불란한 추진에 대한 긍정적 기대도 나왔고 협상 차질 시의 군사적 대응에 대한 불안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한 주요 현안에 대한 ‘트윗 해고’의 파장은 무엇보다 트럼프에 달렸다. 충성하는 폼페이오를 좋아하는 트럼프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며 직언하는 폼페이오도 계속 신뢰하며 전권을 허용한다면 ‘렉시트’는 트럼프의 ‘흔치않은’ 성공적 결단으로 평가 받게 될 것이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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