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혼돈’ 의 백악관

2018-03-08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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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봄은 백악관의 목련이 피는 3월 그리다이언 클럽의 연례 디너파티로 시작된다. Gridiron Club은 글자그대로 석쇠 클럽, 워싱턴 정가 베테랑 기자들의 모임이다. 누가 무엇을 굽는가. 위트와 유머로 활활 피운 불 위에서 구워지는(roast) 것은 정치가들이고 석쇠를 쥔 쪽은 기자들이다. 워싱턴 정계 거물들이 거의 다 참석하는 이날 디너의 주요 코스는 로스트 비프 대신, 로스트 부시, 로스트 오바마…지난 토요일에 열린 금년 디너의 하이라이트는 ‘혼돈의 제왕’으로 뜨거운 불 위에 올려 진 로스트 트럼프였다.

1885년부터 시작된 이 디너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대통령은 없었는데 재선 후 내리 3년 디너를 외면해온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밀려났고, 마지막 해 파티에 불참했던 카터는 재선에서 참패했다. 이런 징크스 때문이었을까, 지난해 참석을 거부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금년엔 예상을 깨고 참석해 자신을 둘러싼 껄끄러운 주제에 조크로 응수하며 기꺼이 그을려 주었다.

탄핵, 러시아스캔들, 논란 많은 사위 재럿 쿠슈너, 백악관의 잦은 이직률 등을 때론 가볍게, 때론 뼈있는 농담으로 풀어간 트럼프는 지난 주 미디어의 핫 토픽이었던 ‘백악관의 혼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 “백악관은 아주 익사이팅하고 활기가 넘친다… 난 사람이 바뀌는 걸 좋아한다, (다음은 누구일까? 스티브 밀러? 멜라니아?) 난 혼돈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번 주 화요일, 미디어들의 ‘가짜 뉴스’를 또 비난하며 “혼돈은 없다, 엄청난 에너지만 있다!”는 아침 트윗으로 시작한 트럼프와 백악관의 하루는 몇 시간 후 수석 경제참모의 사임 발표와 함께 그 배경의 갈등과 내분이 드러나면서 극심한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트럼프 취임 후 1년 넘게 혼돈과 혼돈 사이 잠깐씩의 평온을 숨 쉬며 혼돈에 익숙해졌을 백악관에도 지난 열흘은 뒤숭숭한 ‘혼돈’이었다.

지난주 화요일 트럼프의 사위이자 선임고문인 재럿 쿠슈너는 평소 갈등 빚던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에 의해 1급 기밀정보 접근권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같은 날 하원 정보위의 러시아 스캔들 청문회에 불려가 대통령을 위해 “때로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 놓았던 트럼프의 최측근 호프 힉스 공보국장은 다음날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날 대통령은 자신의 법무장관을 또 다시 맹공격하며 법무부 수사에 간섭하려 했다.

백악관 업무와 개인사업과의 이해상충 의혹이 조여 오면서 윤리검증에 몰린 쿠슈너는 정보 유출자 색출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지난해 5월에 이어 또 한 번 공개 망신을 당한 법무장관 제프 세션스는 자신이 FBI 내부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수치스럽다”고 비난하는 보스의 무차별 트윗에 곧바로 “명예롭고 진실하게 내 책무를 다하고 있다. 법무부는 계속 공정하게 일하면 된다”며 이례적 맞대응에 나서 뉴스의 조명을 받았다.

목요일, 얽히고설킨 궁중암투의 백악관 내분 스토리를 순식간에 덮어버린 폭탄이 터졌다. 1일 오전, 수입 철강 및 알루미늄에 고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대통령의 전격발표가 나왔다. 미국이 불공정 무역으로 큰 손해를 보고 있다면서 보호무역을 주창한 것은 트럼프의 오랜 대선 공약이었지만 집권 후 자유무역 옹호 온건파의 강력반대로 주춤한 듯 보였던 그가 반대파에겐 알리지 않고 전 세계를 향해 ‘무역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폭탄관세의 파문이 미 전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지는 주말을 지낸 후 6일 반대의 선봉에 섰던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이 사임을 발표하면서 내분과 갈등이 극에 달한 백악관의 혼돈상은 다시 한 번 만 천하에 드러났다.

총기규제와 다카 등에선 찬반 입장을 뒤집으며 변덕을 부려온 트럼프에게 관세 부과는 드물게 고수해온 정책이었지만 깜짝 발표로 치닫게 된 배경은 지난 달 초 가정폭력 스캔들로 축출당한 롭 포터 비서관의 사임에서 시작된 도미노 현상이라고 복스는 지적한다.


켈리의 최측근으로 대통령에게 가는 모든 서류를 관장한 포터는 콘과 함께 친 기성정계 그룹을 이루어 국수주의 보호무역파를 견제했고, 트럼프 설득을 위해 자유무역관련 미팅을 매주 마련해왔는데 그의 퇴장 후 대선 때부터 트럼프의 무역정책 참모였던 피터 나바로와 윌버 로스 상무장관 등 보호무역 강경파가 입지를 강화해왔다는 것이다.

월스트릿저널의 보도도 비슷한 맥락이다 : 관세 발표 전날 밤 은밀히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간 무역 강경파들은 두 시간 후 철강 및 알루미늄기업 대표들에게 전화해 다음날 아침 미팅에 초청하며 대통령이 고관세 부과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알렸다. 행정명령은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전 통보조차 받지 못한 콘은 정상적 절차가 무너진 데 대해 좌절했고 한 백악관 참모는 “국수주의자들이 절차를 하이재킹했다”고 전했다.

출범 직후부터 사임과 해고 등으로 참모들이 줄줄이 떠난 백악관이지만 이번 콘 사임의 후폭풍은 좀 다를 것이라는 우려가 백악관 안팎을 감싸고 있다. 합리적 정책을 수립하고 실현 불가능한 정책을 저지할 능력이 있는 소수의 브레인 중 한명이었던 콘의 부재가 권력 암투를 넘어 정책 혼란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다.

앞으로도 참모들의 사임 행렬은 계속될 전망이다. H.R.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의 사임설이 나돈 지는 이미 오래고, 온건파의 ‘부음’을 축하하는 국수주의파가 전면에 나서면서, 콘과 가깝던 쿠슈너는 한층 수세에 몰리고 있는데 쿠슈너를 강등시킨 켈리는 과연 언제까지 안전할까…

2016년 대선의 공화경선이 시작되기 얼마 전 당시 공화당 선두 예비주자로 꼽혔던 젭 부시는 트럼프의 정치적 특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 그는 ‘혼돈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혼돈의 후보’다.

경고를 무시하고 표밭은 혼돈의 대통령을 선택했다. 매일 어지러울 정도로 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미국은 2020년 다시 ‘혼돈의 백악관’을 원할 것인가.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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