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탄호이저’는 중세(12-13세기) 음류시인의 이야기다. ‘탄호이저’라는 이름의 오페라(의 가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음류시인으로서의 ‘탄호이저’는 앞으로 오페라 이야기를 다루는데 있어 꼭 짚고 넘어가야할, 매우 중요한 소재의 오페라 중의 하나이다. 니체는 음악을 모르는 자들과는 이야기도 나누지 말라했다. 여기서 음악은 일종의, 교양으로서의 음악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뒤집어서 음류시인 즉 바그너(류)의 음악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음류시인이란 고대 혹은 중세에 활약했던 노래하는 시인들, 즉 이야기꾼이나 노래꾼들을 지칭하고 있는데 요즘시대의 밥 딜런같은 singer songwriter(자작 가수)같은 가수들이라고나할까. 그러면 왜 니체는 사람이란 꼭 음류시인들을 이해해야만한다고 말했을까?
음악을 알고 시를 알면 인생을 보다 낭만적이고 정서적으로도 풍부한 삶을 이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대화를 피하는 경우는 가치관이나 정서가 다를 때보다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 즉 이방인일 경우가 많다. 다른 문화 특히 종교관이 다른 사람들과 사람들은 결코 말을 섞지 않는다.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정과 가치관이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또 영혼의 큰 물줄기… 즉 구도의 차이, 흙탕물과 맑은 물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순수를 열망한다.
어떤 가치로서의 그 가치를 위해 순교할 수 있는 그 어떤 깨끗한 내면의 소리… 진정한 구의 환희와 열망이 없는 삶을… 우리는 정말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바그너의 음악은 적어도 (도의적으로) 완벽하지는 못했을지언정 하나의 가치를 위한 헌신된, 치열한 자기 투쟁과 열망… 그리고 그 언저리의 신비(환희)가 있었다. 니체가 말하는 음악은 그러므로 일반적인 음악이 아니라 19세기에 일고있었던 음악의 환희(ecstasy)… 순교자들과 그 부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음악을 모르는 자들과는 말도 붙이지 말라. 그것은 구도의 열망과 또 그것을 위해 헌신된 순수와 신비가 없는 자들과는 말도 섞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였다. 진정한 예술을 위하여 헌신하라. 최소한 미치게 열망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위해 살라. 어떤 의미에선 무모했지만 또 행복하기도했던 낭만주의 시대의 정점에 바로 바그너가 있었다.
낭만주의 오페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그 첫 포석 중의 하나로 꾭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탄호이저’였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1842년 바르트부르크 옛성을 구경한 뒤 착상, 1845년 바그너 자신의 지휘로 드레스덴에서 초연됐는데, 1861년 파리 공연 등을 위한 몇몇 개작 등을 거쳐 오늘날의 ‘탄호이저’로 완성되게 이르렀다. 바그너의 종교와 예술, 사랑의 구원관이 녹아있는데 바그너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쓰고 음악, 무대까지 관여하여 1인 3역 혈투끝에 완성시킨 대작이다. 음류시인 탄호이저가 비너스 굴에서 육체의 쾌락 속에 방종하다가 순결한 여인 엘리자베스를 만나 기독교인으로 개종한다는이야기인데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극의 분위기는 다소 무겁고 고답적이지만 ‘순례자의 합창’ 등 음악적으로 매우 훌륭하여 오늘날에도 널리 공연되는, 명작 오페라의 하나로서 사랑받고 있다.
바그너는 열정은 있었지만 승려가 되지도 못했고, 삶에 있어도 단 한명의 진정한 여인도 만나지 못했다. 음악은 그에게 유일한 광채였지만 그가 세기의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이 그에게 유일한 구도의 수단이자 순례의 노래였기에 가능한, 구도의 완성이기도 했다.
로마 순례에 나선 탄호이저는 긴 고난의 행군에도 불구하고 결코 카톨릭을 통해서는 구도되지 못하지만 저멀리 ‘순례자의 합창’이 들려올 때 그의 영혼은 땅 위의 긴 순례를 마치고 진정한 안식 속으로 잠들어 간다. 그것은 또 탄호이저를 기다리다 숨져간 엘리자베스의 영혼을 위해 바쳐지는 순례의 노래이기도 했다.(전 3막, 연주시간 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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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