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 첫 해 성적표

2018-01-25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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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실적’을 자화자찬 해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이 정부 셧다운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다. 샴페인 파티는 취소되었지만 그래도 1주년은 새 대통령 업적의 공과(功過)에 대한 포괄적 평가가 나와야 하는 시점이다.

객관적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전혀 쉽지 않다. 요즘처럼 나라 전체가 보수와 진보로 양분된 시대엔 더욱 그렇다.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포화를 받고 있는 시대엔 대통령 평가에 대한 이성적 논쟁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긍정 평가는 독재적 통수권자에 대한 지지로 일축될 것이고, 부정 평가는 ‘가짜뉴스’로 묵살당할 것이다”라고 프린스턴대학 역사학자 줄리언 젤라이저 교수는 지적한다. 지지층과 반대층, 각각의 시각에 따라 같은 상황이 ‘완벽한 성공’과 ‘처참한 실패’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다운’ 모든 규범과 전통을 던져버린 트럼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의 지난 1년을 AP통신은 ‘눈을 떼기 힘든 드라마’로 비유했다 : 특이한 등장인물들이 수시로 바뀌면서 셀 수 없는 반전이 거듭된 드라마, 심하게 양극화된 나라를 무대로 핵 위협이 떠돌고, 대통령 자질론에 대한 귓속말이 계속되면서, 러시아 수사의 먹구름까지 몰려오고 있는…믿기 힘든 뉴스들이 매일 터져 나와서일까, 다음날이면 상당수는 벌써 잊혀버리고 말았다.


‘2,000여회의 거짓말과 3,000차례에 가까운 트윗’으로 나라 안팎에 혼란을 초래하며 “대통령직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트럼프에 대한 평가는 A와 F가 뒤섞인 컬러플한 성적표다.

아예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며 저항하는 극단적 반대파와 그의 거짓말까지 ‘미디어의 가짜뉴스’로 거부하는 맹종파의 평가는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들거나 실망스런 면도 있지만 좋은 점이 더 많다는 지지층, 일부 항목은 ‘F’가 당연하지만 긍정적 업적에는 좋은 점수를 주겠다는 중도적 반대층의 평가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폴리티코 여론조사에 따른 성적표도 등락이 심하다. 35%가 F학점을 주었다. 그러나 공화당 응답자 72%가 A와 B, 전체 응답자 49%가 A, B 혹은 C를 주었으니 낙제와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 비판에 앞장 서온 뉴욕타임스가 지난 주 취임 1주년을 이틀 앞두고 사설 대신 10여명의 독자편지를 게재, 트럼프 지지자들의 입장을 소개했다.

그중 뉴욕에 거주하는 제이슨 펙은 지지 의견을 이렇게 대변했다 : “맞다, 그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는 불필요한 싸움도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세제개편을 이루었고 IS를 이라크에서 격퇴시켰다. 불법이민보다 미국 시민을 우선시했고, 불리한 국제협정에서 우리를 구해냈다. 수많은 규제를 제거했고 북한과 이란에 실질적 압력을 가했으며 통제 불능 기관들의 고삐를 잡았다…이 같은 정책 실현을 위해 트럼프의 경박한 스타일을 참아야 한다면 난 기꺼이 받아드리겠다”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도 이념과 시각에 따라 A에서 F를 망라했다. “트럼프의 무지, 탐욕, 부정직, 충동, 무책임, 편견, 인종주의 등으로 미 역사에 남겨진 추악한 오점을 지우려면 몇 세대에 걸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개탄한 가브리엘 숀펠드 공화당 정략가는 F를 주었고, 경제부터 법원의 보수화까지 기대 이상의 실적에 더해 “힐러리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A플러스를 주겠다고 테네시 법대 글렌 레이놀즈 교수는 말했다.

상당히 객관적 평가로 공감이 가는 것은 젤라이저 교수가 건넨 성적표다. 수많은 경제규제 해제에서 불체청년 추방유예프로 DACA 폐지까지 행정명령 발동 등으로 강력하게 행사한 대통령 권한 항목에선 A를 주었지만, 도덕적 리더십에선 “대통령이란 민주주의를 진흙탕 속으로 끌어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들이 최고의 이상에 맞춰 살도록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하며 낙제의 F를 통보했다.


미국의 위상을 추락시킨 외교에서도 D를 주었다. 그러나 세제개편을 성공시킨 입법 항목에선 예산적자와 불평등 심화 등의 장기적 악영향 경고에도 불구하고, 감세혜택의 최대 수혜자인 기업들의 임금인상과 보너스, 투자확대 등 가시화된 낙수효과를 지적하며 비교적 후한 B 학점을 선사했다.

눈길을 끄는 또 하나는 대표적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의 평가다. 2016년 오바마의 8년이 끝나갈 무렵, 헤리티지 재단은 새 공화당 행정부가 채택할만한 334가지의 정책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웰페어 수혜자들의 취업의무화, DACA 폐지, 파리기후협정 탈퇴, 일부 성정체성 보호조치 폐지 등 보수 어젠다들이다.

트럼프 집권 첫 해에 실현된 정책은 이중 64%에 이른다. 보수의 황금기준으로 간주되는 레이건 첫 해의 49%보다 훨씬 높다. 트럼프의 선동적 언행과 트윗이 수면에서 소란스럽게 물결치는 동안 물밑에선 사회복지 축소에서 석유시추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보수정책들이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는 뜻이다.

“보수진영도 대통령의 충동적이고 무모한 스타일에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그의 정책결정은 상당한 호감을 얻고 있다”는 헤리티지의 평가는 민주당 뿐 아니라 이민사회에도 경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경기가 계속되고, 다수의 유권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감세 혜택을 누리는 동안 러시아 스캔들 수사가 별 소득 없이 종결된다면 트럼프는 앞으로도 한참 더 백악관에 머물 것이다. 그의 재집권을 보장하는 것은 보수표밭이고 보수의 최우선과제 중 하나가 ‘반 이민’ 정책인 것을 명심하며 이민사회는 “도덕적 분노의 물결에 편승”보다는 더 실질적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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