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시궁창’에 빠진 DACA

2018-01-18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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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화요일 우리에겐 이민타협안은 초당적이라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 내가 자랑스럽게 함께 골프를 치며 ‘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대통령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난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를 되찾고 싶다” - 이틀 전 연방상원 법사위 청문회에서 나온 공화당 중진 린지 그레이엄의원의 발언엔 대통령의 변덕에 대한 개탄이 역력했다.

사실 새해 들면서 80만 ‘드리머들’의 운명을 좌우할 불법체류 청년 추방유예 프로그램(DACA) 해법에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지난주 화요일 백악관 이민회동의 분위기는 드리머들을 설레게 할 만큼 장밋빛이었다.

오랫동안 포괄적 이민개혁법을 추진해온 공화당의 그레이엄과 민주당의 딕 더빈 상원의원 등 상하원 양당의원들을 불러 모은 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더없이 ‘안정적이고 초당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였다. 드리머들을 보호하는 한편 국경경비 예산을 확보하고 가족이민제와 비자추첨제를 개혁하는 이민법안의 골격을 제시하며 양당의 합의가 이뤄지면 자신의 마음에 안 들더라도 무조건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DACA 해법을 ‘사랑의 법’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합의 과정에서 비난이 제기될 경우 “내가 욕을 먹겠다”는 순교자적 태도까지 보여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긍정적 방식”의 특별한 회의였다는 찬사도 얻어냈다.

그런데 그 후 이틀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목요일, 대통령의 격려에 힘을 얻은 이민협상 6인방 상원의원들이 합의안을 들고 찾아 간 백악관의 2차 회동 분위기는 한마디로 ‘급랭’이었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의하면 6인방은 “공화당 이민강경파 의원들이 먼저 도착해 있는데다 대통령의 태도 또한 훨씬 적대적으로 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표변한 대통령은 이틀 전과는 달리 합의안에 비판적 태도로 일관했고, 비자추첨제 종료 부분에서 자연재해와 내전 겪은 국가 출신자들에게 임시보호지위 비자를 일부 돌린다는 설명에 버럭 화를 내며 아이티와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겨냥해 막말을 퍼부었다고 한다. - 왜 우리가 노르웨이 같은 나라가 아니라 시궁창(shithole) 나라에서 온 이민들을 받아야 하느냐(트럼프 본인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잡아떼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대부분 공화당 인사들의 기억력 상실로 인해 정확한 인용은 불가능하다!)

왜 트럼프는 태도를 바꾼 것일까. 트럼프 백악관 내부에 초당적 DACA 협상을 원치 않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워싱턴포스트 보도는 시사한다. 화요일의 ‘친이민’ 회동에 놀란 일부 강경보수 참모들이 반이민 의원들을 동원해 대처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더빈과 그레이엄의 꼬임에 넘어가 DACA 협상안에 서명해 핵심표밭에서 반발을 살까 우려해서다.

배경추정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다혈질 트럼프의 ‘시궁창’ 폭탄은 터져버렸고 그 파문은 일파만파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번지면서 모든 뉴스를 집어 삼켰다. 이민논쟁은 ‘시궁창’이란 비속어를 사용했다, 안했다의 말싸움·패싸움으로 추락하면서 핵심은 내팽개친 채 당파적 적대감을 불 지폈고 급기야는 “DACA는 아마도 죽었다”고 선언하며 민주당을 맹공격하는 트럼프의 트윗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서 몇 달에 걸쳐 요구하고 설득하는 협상을 계속한 끝에 겨우 합의한 DACA 해법 또한 그 시궁창 속으로 빠져버렸다.

이번 금요일, 19일 자정까지 통과시켜야 하는 예산안과 맞물려 있어 DACA 타협안의 전망은 한층 더 복잡하다. 의회가 아무 것도 안하면 정부는 국가안보 등의 필수사안을 제외한 업무가 정지되는 ‘셧다운’에 직면한다.


정부 셧다운은 예산안에 달려있고, 예산안은 DACA 해결에 달려있다.

DACA 해법 없이는 어떤 예산안도 지지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민주당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단호한 한 목소리는 아니다. 2020년 대선 예비주자들을 비롯한 진보파들은 모든 수법을 동원해 트럼프에 강력하게 맞서기 원하지만 2018년 보수표밭에서 재선에 나서는 중도파 의원들은 셧다운 쪽에 서는 것을 꺼린다.

곤혹스럽기는 공화당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셧다운이 현실화될 경우 그 책임은 전권을 장악한 공화당이 질 수밖에 없다. 공화당 지도부는 지난주 연방법원의 DACA 폐지결정 일시적 중단에 따라 DACA 신청이 일단 재개된 것을 지적하며 DACA 해법이 당장 시급한 것은 아니라고 민주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아무도 셧다운은 원치 않으니 양당 모두 시간을 벌려고 노력 중이다. 겨우 한 개 나온 타협안이 백악관에 거부당한 상태에서 또 다른 합의안을 금요일 자정까지 마련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원은 공화당 표만으로 통과시킬 수 있는, 4주짜리 임시예산안 통과를 강행할 방침이지만 상원통과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양당 지도부는 벌써 셧다운 책임 공방에 대한 준비에 돌입했다는 소문이다. DACA 협상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민사회를 다시 불안케 한다.

DACA 대립의 기저에 많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에서 일하고, 세금 내며 살고 있는 수십만 드리머들, 미국이 유일한 조국인 이 젊은 이민자들의 삶이 달린 DACA 해법이 당파적 게임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양당 의원들은 잠시 정치적 계산을 접어두고 더 늦기 전에 ‘시궁창’에 빠진 DACA를 건져내야 한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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