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얀 모기장과 꼰대

2018-01-15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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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모기장과 꼰대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지금 당신은 말라리아로 고통 받는 지역에서 국제개발활동의 일환으로 모기장을 나눠주고 있다. 그런데 지역주민이 “하얀색 모기장으로 부탁해요” 라고 말한다. 하얀색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얀색 모기장을 주문해서 주민들 손에 쥐어 준다. 왜 하얀색을 달라고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남지만, 숙소로 돌아온 후에 곧 잊어버린다.

집집마다 모기장이 걸려 있기를 기대하고 지역을 한 바퀴 돌아보지만, 모기장을 달아놓은 집이 없다. 그 많은 모기장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말라리아를 예방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 모기장인데, 왜 나눠줘도 달지를 않는 걸까. 이래서는 말라리아 발병률이 올라가기만 할 텐데 어떡하나. 점점 의아해진다.

답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 있었다. 지역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있는데, 결혼식 신부용 면사포가 곱게 걸려 있다. 낯이 익어서 유심히 뜯어봤더니, 얼마 전에 나눠줬던 하얀색 모기장이 면사포가 되어 시장에서 팔리고 있었던 거다.


국제개발협력을 하던 선배가 해준 이야기다. 일하고 있는 지역에 말라리아 문제가 심각해서 모기장을 배급했지만, 지역주민들에게는 언제 걸려서 죽을지 모르는 말라리아보다 내일 당장 식량을 살 돈이 더 급한 건지도 모른다. 전문가로서 모기장의 말라리아 예방효과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지역주민이 처한 상황을 주민의 입장에서 읽어내지는 못한 결과다.

타인을 진심으로 도와주려면,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 서 봐야 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 조언을 한다면,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 행동하는 방식, 이미 받고 있는 도움, 이전의 경험 등등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은 다음에, 그 사람이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생각해 봐야 적절한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모기장을 배급하면 말라리아 발병률이 유의미하게 낮아질 수 있다는 걸 전문가들은 경험으로 안다. 그렇지만 모기장이 발병률을 낮추는 데 성공한 이유는 지역주민들이 말라리아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모기장을 웨딩드레스로 만들어 팔아야 할 만큼 푼돈이 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모기장을 배급하는 사람들이 설치까지 전부 해주어서일 수도 있지만, 단지 모기장이 초록색이어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모기장을 나눠주는 해법 자체가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라도, 상대방이 처한 맥락과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조언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역시 마찬가지다. 내 경험과 상대의 경험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해봤다고 해서 상대방이 하는 법을 아는 건 아니다. 내가 앉아있는 편한 자리에서 내 경험과 철학을 늘어놓는 건 조언이 아니라 한낱 자기 자랑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내 조언이 힘이 되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의 자리에 서봐야 한다. 지금까지 이 사람이 내게 말해준 것과 말해주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이 사람에게는 이 상황이 어떻게 느껴질지 꿰뚫어 보고, 내 조언이 이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미리 예상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 자리를 벗어나 상대방의 자리에 서는 건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의 자리에 서보지 않은 조언은 면사포용 모기장보다 못하다. 아무리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라고 해도, ‘내가 해 봐서 안다’고 해도, 나와 타인은 본질적으로 다른 역사와 경험을 가진 다른 존재다. 꼰대는 꼬장꼬장한 아저씨가 아니라, 타인의 자리에 서볼 성실함이 없는 존재다.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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