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블랙 선데이

2018-01-12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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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선데이
모두가 하비 와인스틴 탓이다. 지난 7일 베벌리 힐즈의 베벌리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온통 흑색으로 물결쳤다. 여성 스타들이 모두 흑색 드레스를 입어 그들이 밟는 레드 카펫과 치열한 대조를 보였다.(사진)

흑색 드레스는 미 독립영화계의 거물 와인스틴의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폭로된 이후 미 사회전반에 걸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와 불균형에 저항하는 의도로 스타들을 비롯한 할리웃 여성들이 조직한 ‘타임즈 업’을 지지하는 차림이다.

물론 예년 같았으면 식장의 VIP 테이블을 차지했을 와인스틴은 보이지 않았고 먹을거리와 마실 것이 푸짐했던 와인스틴 애프터 파티도 종적을 감췄다. 푸어 소울.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주최하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식 중에도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즐기는 할리웃 최고의 파티로 알려져 있다. 식 중에 탐 행스가 식장 옆의 오픈 바에서 칵테일을 주문해 쟁반에 올려놓고 손수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 자기 자리로 간다.

그러나 이 날은 ‘타임즈 업’의 분위기가 축제 분위기를 압도해 마치 사회적 문제에 관한 소견 발표회장에나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여성 수상자들이 한 결 같이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와 불균형에 대해 한 마디씩 해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기에는 물론 옷깃에 ‘타임즈 업’ 핀을 꽂은 남성들도 동참했는데 살펴보니 마지못해 박수치는 남자도 더러 보인다. TV 드라마 ‘레이 도노반’으로 주연상 후보에 오른 리에브 슈라이버는 박수와 기립이 모두 엉거주춤하는 모양이었다.

여성 파워가 식장을 뜨겁게 달궜는데 묘하게도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이 대거 상을 탔다. 딸이 살해된 어머니가 쓴 경찰의 수사를 촉구하는 광고를 둘러싼 도덕극 ‘미주리 주 에빙 밖의 3개의 광고’가 드라마 부문 작품·각본(감독인 마틴 맥도나)·여우주연(프랜시스 맥도만드) 및 남우조연상(샘 락웰)을 타 최다 수상작이 되었다.

또 가족과 삶의 터전을 떠나고파 안달이 난 여고 3년생의 얘기로 여배우 그레타 거윅이 감독한 ‘레이디 버드’는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서샤 로난)을 탔다. 그리고 TV 부문에서도 여자가 주연하는 여성들의 얘기인 ‘하녀의 이야기’와 ‘빅 리틀 라이즈’가 작품상 등 여러 부문에서 수상했다.

생애업적상인 세실 B. 드밀상 수상자 오프라 윈프리가 수상 소감을 발표하면서 시상식은 절정에 달했다. 윈프리는 “새날이 지평선에 떠오르고 있다”면서 “그 누구도 결코 다시는 ‘미 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때가 오기를 희망 한다”고 강력한 발언을 해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윈프리도 성적 학대의 희생자이다.

윈프리의 소감 내용이나 발언하는 모습이 마치 정견 발표를 하는 것 같았는데 이 장면이 NBC-TV로 방영되면서 윈프리를 다음 선거에 대통령후보로 내보내자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에대해 트럼프는 9일 “내가 오프라에게 이길것”이라고 호언장담 했다.


작년 세실 B. 드밀 상 수상자는 메릴 스트립으로 스트립은 수상 소감에서 대통령 당선자인 트럼프를 신랄하게 비판해 큰 화제가 됐었다. 2년 연속 여성 수상자가 홈런 성 소감 발표를 한 셈이다.

이 날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은 ‘다키스트 아워’에서 처칠 역을 한 게리 올드만이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은 할리웃 사상 최악의 영화인 ‘룸’을 자비로 만든 타미 와이조의 영화 제작과정을 다룬 실화 ‘디재스터 아티스트’에서 와이조로 나온 제임스 프랭코가 탔다. 감독상은 벙어리 여자청소부와 수중괴물의 사랑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물의 모양’의 기예르모 델 토로가 탔다. ‘물의 모양’은 음악상(알렉상드르 데스플라)도 탔다.

여우조연상은 피겨 스케이터 타냐 하딩의 실화를 그린 ‘아이, 타냐’에서 타냐의 악모로 나온 앨리슨 재니에게 돌아갔다. 외국어영화상은 독일작품 ‘인 더 페이드’ 그리고 만화영화상은 ‘코코’에게 각기 돌아갔다.

이 날 각본상을 주기 위해 배우 며느리 캐서린 제이타-존스가 미는 윌체어에 앉아 나온 커크 더글러스(101)를 본 것은 안 보는 것만 못 했다. 다부지고 강인했던 체구의 스파르타커스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더듬대며 말하는 것을 보다가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시상식은 대의명분이 축제 분위기를 앞지른 쇼였다. 그래서인지 심야 토크쇼 사회자인 세스 마이어스가 사회를 본 쇼의 시청률이 작년보다 5%나 떨어졌다.

그러나 골든 글로브쇼는 2017년 오스카 시상식에 이어 시청률이 가장 높은 비스포츠 TV프로다.

*지난 칼럼 ‘나의 베스트 텐’에서 2차대전시 영국군의 던커크 철수를 다룬 ‘던커크’가 누락됐습니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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