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남북 협상 전말기

2018-01-1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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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2일 이후락은 박정희의 특명을 받고 평양을 방문, 4일 새벽 김일성과 만나 사상 첫번째 남북 고위 당국자 비밀회담을 연다. 이후락은 어금니 임플랜트에 청산가리를 숨겨 가지고 갔다. 자칫 일이 잘못 되면 자살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남북 공동성명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뤄졌다.

남북은 이 성명에서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하고, 무력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실현해야 하며,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의 민족으로서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이 준 감격은 컸다. 6.25 전쟁 후 간첩과 무장공비 남파로 점철된 남북 관계를 끝내고 평화 공존 후 통일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심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벌어진 현실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박정희는 같은 해 10월 유신을 선포해 종신 집권의 길로 들어섰고 북한도 국가를 주석 체제로 바꾸고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와 영구 집권 체제를 수립했다. 돌이켜 보면 남북한 지도자가 남북회담을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 후 박정희 암살과 전두환 집권, 아웅산 테러와 KAL기 폭파 등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 관계는 1994년 김영삼이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면서 풀리는 듯 했으나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2000년 김대중 김정일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개선되는 듯 하다 북한이 몰래 핵 개발을 추진해 온 것이 드러나면서 다시 얼어붙었다.

2007년 노무현이 다시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만나 대화의 물꼬를 트려 애썼으나 숱한 퍼주기에도 불구, 북한은 금강산 관광객 사살 및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답했고 이와 함께 남북관계는 깊은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과 핵 실험으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어느 때보다 엄중해진 가운데 지난 9일 판문점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이날 양국은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장 밑으로 거세게 흐르는 물처럼 북남 고위급 회담이 마련됐다고 생각한다”며 희망적인 발언으로 회담을 시작해 북한어 평창 겨울 올릭픽에 대규모 방문단을 파견하고 군사적 긴장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군사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 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 문제가 나오자 북측은 태도를 돌변, 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지 동족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며 비핵화를 거론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고 협박했다.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사적 긴장의 주 원인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다. 이 핵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적이 실현 불가능한데 북한은 이를 아예 협상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봐도 지난 수십년간 온갖 제재를 무릅쓰고 핵 개발에 성공해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된 북한이 이제 와 이를 포기할 가능성은 없다. 결국 이쪽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생각은 없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요구하다 들어주지 않으면 또 판을 깨고 도발을 재개할 공산이 크다. 그게 지난 수십년간 남북관계의 고정 패턴이었다.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오는 것은 좋지만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헛꿈이라 봐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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