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또 한번의 물음

2018-01-06 (토) 천양곡 /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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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음률이 라디오에서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그 전날 밤 아내와 함께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을 한 후 잠자리로 가다가 창문 밖 하늘에 떠있는 큰 보름달, 수퍼 문(Super Moon)을 보았다. 달 아래 눈 덮인 골프장에는 맑고 푸른 둥근 달빛으로 물든 얼음 호수가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얼음 호수 위에서 고개를 쳐들고 새해 처음으로 지구촌에 가깝게 다가온 보름달을 향해 길고 아련히 울부짖는 늑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느 동물학자는 늑대를 길들여 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개의 해, 보름달 중의 수퍼 문, 수퍼 문 중의 늑대 문으로 시작하는 2018년의 출발점을 나는 이미 떠나고 있었다.

올해는 어떻게 살까? 새해 아침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물음이다. 그 물음을 오랫동안 해마다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자동적으로 활성화되어 파블로프가 실험한 개의 침 흘림처럼 조건반사로 무의지적으로 튀어나온다. 자꾸 찾아오다보니 뇌 깊숙한 곳에 묻힐 시간이 없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에서 방황하다가 새해가 오면 이때다 하며 기어 나온다. 인생여정의 길동무인 개띠 해라 그런지 금년에는 더 빨리 그 물음이 내게 다가 왔다.


역동정신의학의 창시자 프로이드는 어릴 적에 체험한 정서적 상처의 치유를 통해 현재 나타나는 삶의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내면 깊숙이 잠들고 있는 상처를 통찰하고 지금 이 순간 마음의 아픔을 주게 한 근본적 뿌리를 찾아보는 방식으로, 과거를 현재보다 더 중요시 여겼다.

반면 아들러는 개인심리학 이론을 통해 미래 지향적이고 긍정적 사고를 강조했다. 그는 극단적으로 과거의 체험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미래에 너무 치중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정신심리학은 아들러 쪽에 더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지금의 정신치료 역시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방점을 찍고 과거의 체험을 등한시 하는 인지행동 요법, 마음 챙김 명상요법, 가상현실 요법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음은 다짐이나 소망을 기대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실행하지 못하는 다짐보다 마음속에서 바라는 소망으로 답하고 있다. 소망은 지나간 과거의 체험들, 현실의 삶, 다가오는 미래의 희망이 균형을 잡은 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흘러간 세상과 과거의 내가 없으면 현재와 미래의 나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사 하루야마 시게오는 어려서 부터 침술을 익히는 등 동양의학을 접하고 커서는 도쿄의대에서 서양의학을 전공했다. 일생을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융합한 방법으로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뇌내 혁명’ 이란 건강서적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가 의료생활 말년에 한 말이 있다. “건강을 가장 잘 지켜주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다. 실제로 마음의 평안이 건강에 차지하는 비율은 규칙적 운동, 균형 잡힌 식습관과 소식, 충분한 수면, 과로를 피하는 적당한 휴식 등을 합친 것 보다 높은 55% 이상의 수치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평안하게 하면 이미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컴퓨터 옆 창문 너머 저 멀리 보이는 동편 끝자락이 벌써 불그스레한 띠를 두르고 있다. 이제 둥근 달은 희미해지고 곧 떠오를 둥근 새해를 기다리는 가슴 뜀은 무지개를 쫒던 소년의 마음 그대로다. 그 가슴 뜀은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떠민다.

“그래 금년에는 편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 또 노력해 보자,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이니까.”

그런데 내 맘을 편하게 해줄 가까운 사람들의 도움을 바란다면 그것은 지나친 소망일까?

<천양곡 /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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