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는 왜 부끄러운가

2018-01-06 (토) 나운택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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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1500년대 초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하기 전까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이 지동설을 믿었던 사실 때문에 종교재판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자기의 소신을 굽힌 후에야 겨우 풀려났으나 재판정을 나서면서 나직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세상이 아무리 부정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신라에서도 대신들의 반대가 심했다. 왕은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불교 공인여부를 논의하게 했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하는데 이차돈만이 적극 찬성하다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목을 베는 순간 우윳빛 피가 한 길 넘게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 후 새로운 사상인 불교가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이 후에도 새로운 사상이 들어올 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거나 죽임을 당하는 과정은 반복되어 왔다. 유럽에서는 수백년에 걸쳐 무수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과정을 거쳐 이제는 이런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다. 한국도 90년대 말에 급속한 민주화가 이뤄진 후 21세기에 들어서며 그런 전근대적인 분위기가 거의 없어진 듯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근래 들어 한국에서는 다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표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하다. 단순히 사회 분위기 차원을 넘어 아예 국가기관이 그런 일에 앞장서는 사례가 늘어감을 본다.

다수 국민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공연이 공공연하게 집단 테러적인 협박으로 취소되는가 하면, 국가가 대학교수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막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특정사건에 대해서는 정부의 공식적 견해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기도 한다. 집권세력과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들의 권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최근에는 어느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조사 연구한 끝에 내놓은 저서의 내용이 다수 국민이 믿고 있거나 믿고 싶어하는 사실과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 일부를 삭제하게 하고, 벌금을 천만 원씩이나 부과하는 일도 있었다. 판결문에 나오는 판결의 이유를 보면, “책의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사회와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는 다른 인식을 독자가 갖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리고 판시했다.

그 판사가 말하는 ‘사실’이란 지금의 사회분위기에 맞고 집권세력과 다수국민들이 믿고 있거나 믿고 싶은 사실이 곧 ‘사실’이고 ‘절대적인 진실’인 듯하다.

이성의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 한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아무리 그럴듯한 법률과 제도를 갖추고 있더라도 문명화된 개방사회가 될 수 없다. 구성원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된 자유 민주국가를 이룰 수 없다.

요즘 한반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듣고 있노라면 예전에 역사책에서 읽었던 장면들이 자꾸 겹쳐져 고개를 흔들 때가 많다. 수백년 전의 종교재판과 마녀재판의 망령이 어떻게 21세기 한반도에서 버젓이 되풀이 되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다.

한쪽에선 ‘보수’ ‘진보’의 망령에 사로잡혀 집단적으로 이성적 까막눈이 되어 허우적거리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고대왕조 국가놀이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요즘 들어 부쩍 누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답하기가 부끄럽다.

<나운택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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