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정은의 주판

2018-01-0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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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관계 파탄은 박근혜 정부 비판자들의 단골 메뉴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잘 풀려가던 남북 관계가 이명박 박근혜의 적대 정책으로 틀어지고 악화됐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명박은 취임 초 ‘비핵 개방 3000’ 구상을 내걸고 북한과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북한이 핵을 버리고 개방 정책을 편다면 북한의 국민 소득을 10년 안에 3,000달러까지 끌어 올리겠다는 정책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지원금도 7억 6,000만 달러로 김대중 13억, 노무현 14억 달러보다는 적지만 상당한 액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런 이명박의 제스처에 2010년 3월에는 천안함 폭침으로 46명의 대한민국 젊은이를 수장시키고 같은 해 11월에는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 및 민간인 4명을 죽이고 19명에 중경상을 입히는 것으로 답했다.


박근혜 정부는 ‘드레스덴 선언’을 통해 “서로 대화하고 약속을 지키며 호혜적으로 교류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신뢰를 쌓아갈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가속적인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화답했다. 그 결과 북한은 이제 사실상 핵 보유국의 지위를 달성했다. 이런 상황이면 남북 관계 파탄 책임은 북한에 돌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햇볕 중독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베를린으로 달려가 남북 화해와 신뢰 회복을 촉구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대대적인 경제 지원을 하겠다며 북한을 흡수 통일할 의사가 없음과 체제 보장도 약속했다. 그는 그 후에도 보는 사람이 애처로울 정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제안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북한의 멸시와 조롱뿐이었다.

그러던 북한이 지난 1일 김정은 신년사를 통해 느닷없이 평창 동계 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혀왔다. 김정은 평창 올림픽이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라며 “동족의 경사를 같이 기뻐하고 서로 도와주는 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했다.

김정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재인은 반색하며 북한과 접촉을 지시했지만 북한은 3일 현재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정은은 무슨 속셈으로 평창 참가를 시사했으며 왜 또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북한은 거듭되는 유엔의 경제 제재로 어느 때보다 고립돼 있다. 이를 뚫을 돌파구가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자신들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다르다는 점을 지지자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평창 참가 대가로 북한이 요구할 것이 뭔지는 뻔하다. ‘인도주의적’ 대규모 경제 지원, 금강산 관광과 개성 공단 재개, 한미 군사 훈련 중단, 핵 보유국 인정, 대북 확성기 및 전단 살포 등 적대 행위 금지 등등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청구서를 들이밀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곤경에 빠지는 것은 문재인 정부다. 북한 요구를 수용하자니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질 것이고 거부하자니 햇볕 중독자들로부터 남북 관계를 파탄시킨 이명박 박근혜와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는 남한이 돈을 주면 좋은 일이고 주지 않더라도 주니 마니 하며 남남 갈등이 격화되고 한국과 미국 간에 균열이 생긴다면 더욱 기쁜 일이다. 한마디로 북한에게 평창은 꽃놀이 패인 셈이다.

평창 참가를 툭 던져 놓고 남한의 화답에 침묵으로 깔아뭉개는 것은 김정은의 문재인 길들이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남북문제에서 누가 상전이고 운전사인가를 이번에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에 비해 착하기만 한 문재인의 얼굴이 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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