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겨울을 걷다

2017-12-30 (토) 최동선/ 전 코네티컷 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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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크기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동네를 만들고 사람들은 서로 이웃이 되었다. 같은 골목에 마주하고 살면서도 이웃과 마주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오가는 차 안에서 손을 마주 흔들며 어렴풋이 익힌 얼굴을 이웃이라 믿는,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서로에게 무심한 이웃이었다.

10여년을 넘게 살고서도 이웃에 누가 사는지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내 이웃 이어서 또 한 해가 편안했음을 느낀다. 빈숲을 지나며 한껏 날을 세운 바람은 언덕을 내려오며 기세가 등등해졌지만 그런 추위조차도 겨울이 주는 선물이라 여기며 모처럼 골목 안 쪽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옷깃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제법 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지나치던 골목길의 사소한 풍경을 너그러운 시간에 담는 모처럼의 호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마당 끝에 삐딱하게 서서 여위어 가는 눈사람이 며칠 전에 온 첫눈의 흔적으로 남아 있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휘파람 소리를 내던 빈 가지에 요란한 오색 불빛이 반짝이는 걸 보니 새로 이사온 이웃집에는 분명 어린아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외등 하나 켜두는데 드는 전기 값이 아까워 일년 내내 등을 내걸지 못했던 아일랜드 노인 집에도 하얀 사슴 한 쌍이 세상 구경을 나왔다. 그의 남루한 등불은 이웃들에게도 말없이 전염되어 가난한 동네의 추운 골목길은 갑자기 동화책 속의 풍경이 되었다.

허리 굽은 노인이 올리는 등불 하나가 이웃들에게 따뜻한 희망을 선물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서로 경쟁하듯 오색 불빛을 내걸며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늘의 어딘가에 닿아 있지 않을까? 서로의 시선이 맞닿아 있기만 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위로가 될 것임을 믿는다.

시름을 등에 업고 언덕을 오르다가 누군가 정성스럽게 쌓아 놓은 돌탑을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 거 같았다. 만약 산타클로스가 있다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 골목길의 끝에, 내가 서 있었다.

삶은 천천히 살아야 풍족하다는 것을 12월이 되어서야 느끼는 것은 지난해와 다름이 없지만, 끝이며 시작으로 가는 경계에 서니 삶은 그저 과정이라는 것을 알겠다.

지나온 세월은 깨질까봐 손에서 내려놓지 못한 유리창 같았다. 사라진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는 미련함도 여전했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오욕의 날도 내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인다.

나는 나 이외의 누구에게도 무심했었다. 나는 또 얼마나 자주, 그리고 쉽게 잊어 버렸던가?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고통은 왜 그렇게 외면하며 지나쳤던가?


성공을 향해 달려 왔지만 지나온 길은 실패의 나날이었음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간은 성공과 실패만으로 재단할 수 없는 신비의 여정이었다. 시간의 궤도를 따라 지칠 만큼 질주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토닥여 본다.

독일어로 생각한다는 말은 ‘DENKEN’이고 감사하다는 말은 ‘DANKEN’ 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커 (Martin Heidegger)가 어느 글에서 ‘생각하는 존재라는 말은 감사할 줄 아는 존재라는 말과 의미하는 바가 같다’ 고 했었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생각하며, 감사하며’라는 화두를 다시 만난 것은 12월이 주는 선물이었다. 12월, 끝내 비워내지 못한 욕심을 끌어안고 오늘도 길 위를 서성인다.

<최동선/ 전 코네티컷 한인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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