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되치기’에 당한 한국
2017-12-28 (목) 12:00:00
‘이면합의’란 겉으로 공개된 합의내용과는 다른 별도의 합의를 의미한다. 대개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이면합의를 하기도 하지만 ‘갑’의 위치에 서 있는 한쪽의 강력한 요구를 약자인 ‘을’이 마지못해 응해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이면합의는 대개 두 가지 목적과 사유에서 만들어진다. 하나는 누설되면 합의 당사자들의 이익이나 명예에 치명적 손상이 예상되는 곤란한 내용을 이면합의 형태로 작성하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공개된 합의서 내용과 배치되거나 다른 내용을 음성적인 합의서 형식으로 작성해 훗날 분쟁이 발생했을 때 증거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경우이다. 어떤 목적이 됐든 이면합의에는 감추고 싶은 내용이 담겨 있다는 본질적 성격은 똑같다.
한국에서 뛰는 외국인 용병선수들의 연봉이 엄격히 제한됐던 시절 구단들이 발표하는 계약내용을 믿는 스포츠팬들은 거의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규정에 맞춘 액수를 발표하지만 실제로는 이면계약을 통해 훨씬 더 많은 연봉을 안기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공직자 인사청문회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다운계약서’도 이면합의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면합의가 일상화된 사회 분위기의 영향 탓일까. 지난 2015년 발표된 한국과 일본 간의 위안부 문제 합의 때도 이면합의가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외교부 장관 직속으로 지난 몇 달간 합의 내용을 검토해 온 태스크포스(TF)는 양국 간에 이면합의가 있었으며 당시 박근혜 정부는 이런 사실을 은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27일 발표했다.
이면합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한국정부는 해외 소녀상과 기림비 건립을 지원하지 말아야 하고,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를 설득하며, ‘성노예’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일본 쪽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있다. 이번 발표를 보니 왜 그동안 한국정부와 재외공관들이 소녀상과 기림비 건립 문제에 대해 ‘외교적 마찰 우려’를 이유로 들면서 그토록 소극적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한국정부의 이런 태도는 일본정부의 적극적 저지 노력과 대비되면서 의혹과 비판의 대상이 돼 왔다.
합의에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다. 본래는 한국이 ‘되돌릴 수 없는 사죄가 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 표현을 넣을 것을 주장했지만 오히려 ‘되돌릴 수 없는 최종적 합의’라는 뜻으로 ‘불가역적’이란 단어가 사용됐다. 일본의 되치기에 호되게 당한 것이다.
출범 초기 일본의 진정한 사과 없는 관계정상화는 없다며 강경 입장을 분명히 했던 박근혜 정부가 기존 입장에 배치되는 내용의 합의를 발표하자 일본과의 동맹을 중시하는 미국의 압력과 요구에 굴복한 것 아니냐는 등 다양한 분석과 억측이 뒤따랐다. 그 배경이 무엇이든 위안부 문제의 가해자와 피해자 입장을 뒤바꿔놓은 합의는 원칙과 철학의 부재가 낳은 외교실패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전격적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과의 관계악화, 위안부 졸속합의로 불편해진 일본과의 관계 등 이래저래 문재인 정부는 전임 정부가 던져놓은 외교적 난제들을 한 아름 떠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