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앨라배마의 아우성

2017-12-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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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라배마 최대 도시인 버밍햄은 남북 전쟁 이후인 1871년 영국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다. 도시 이름도 영국 제2의 도시인 버밍햄을 따 만들어졌다. 남부의 값싼 흑인 노동력을 이용해 철강 산업이 발달한 이곳은 남부 최대의 공업 도시로 ‘남부의 피츠버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흑인 노동자들의 저임으로 부를 쌓은 백인 공장주들과 착취와 차별에 시달리면서 열악한 삶을 이어온 저소득 흑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이곳이 60년대 민권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차별에 항의하는 흑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을 억누르려는 KKK단의 행동도 과격해졌다. 이들이 백인 거주지로 이사온 흑인이나 좀 “건방지게 구는” 흑인 가정에 다이나마이트를 던지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버밍햄의 별명이 ‘바밍햄’(Bombingham)이 된 것은 이때부터다.

버밍햄의 흑인 민권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웅변으로 이름난 흑인 설교자 프레드 셔틀워스다. 그는 자기 힘만으로 흑인 차별과 인종 분리를 없애는데 한계를 느끼고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버밍햄으로 초청한다. 킹도 젊은 시절 버밍햄에서 목사로 일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함께 ‘프로젝트 C’라는 대규모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며 그 결과 킹 목사는 버밍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운동에 동참했다 체포된 사람만 3,000명이 넘는다. 킹 목사가 감옥에서 쓴 ‘버밍햄 감옥에서의 편지’는 어째서 흑인 민권 쟁취를 위해 시민 불복종이 필요한가를 설파한 걸작으로 민권 운동 핵심 문서의 하나이며 미 주요 대학 교재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종이가 없어 신문지 여백에 쓴 글에서 킹 목사는 “너무 오래 지연된 정의는 거부된 정의”라는 얼 워런 연방 대법원장의 말을 인용하며 흑인들의 민권 보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임을 역설했다. “어느 한 곳에서 저질러진 불의는 모든 곳에 있는 정의에 대한 위협이다”라는 그의 말은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경구다.

1963년 9월에는 버밍햄에 있는 16가 침례 교회에서 폭탄이 터져 4명의 흑인 소녀가 사망했다. 이에 대한 미국민의 분노가 1964년 연방 민권법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가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은 킹 목사를 비롯한 민권 운동가들과 앨라배마 흑인 주민들의 희생 덕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 민권사에 큰 획을 그은 앨라배마 주민들이 지난 12일 다시 역사적인 위업을 이룩했다. 붉디 붉은 공화당의 아성인 앨라배마가 12일 열린 연방 상원 보궐 선거에서 근소한 표차지만 공화당의 로이 모어 대신 민주당의 덕 존스를 주민 대표로 선출한 것이다.

존스는 1998년 연방 검사로 재직 중 1963년 버밍햄 침례 교회 폭발 사건의 범인이면서도 법망을 피해 살고 있던 토머스 블랜튼과 바비 체리를 기소해 2001년과 2002년 유죄 평결을 받아낸 인물이다. 이들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블랜튼은 아직 복역중이며 체리는 2004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런 인물이 유색 인종을 비하하고 노예제를 미화하며 동성애를 범죄로 여기면서 10대 여성들을 성추행한 의혹을 받고 있는 로이 모어를 물리쳤다는 것은 특히 뜻깊다. 이로써 공화당의 연방 상원 의석 수는 52에서 51로 한 석 줄어들게 됐으며 내년 중간 선거에서 다수당 위치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이와 함께 그를 지지했던 도널드 트럼프와 극우 백인 우월주의자 스티브 배넌은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미국의 희망을 확인시켜준 앨라배마 주민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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