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 분노시대

2017-11-22 (수) 이철 고문
작게 크게
미국이 성추문 뉴스로 난리다. 할리웃에서 시작된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발은 영화계뿐만 아니라 언론계, 정치계, 문화계, 스포츠계,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불길이 번져 유명인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앨 프랭큰 연방상원의원(민주, 미네소타)이 사과성명을 내는가하면 민주당 하원 내 서열 5위인 린다 산체스 의원(캘리포니아)은 동료의원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폭로했으며 뉴욕타임스의 백악관 출입기자도 직무정지 당했고 PBS 방송의 유명한 진행자인 찰리 로즈도 성추문으로 고발당하고 있다.

가장 쇼킹한 것은 부시 대통령(아버지)의 성추행이다. 여배우 헤더 린드, 소설가 크리스티나 클라인 등 6명이 부시와의 기념촬영에서 부시가 손을 뒤로 돌려 자신들의 엉덩이를 만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시는 올해 93세다. 지금까지는 살아있는 대통령 중에 가장 존경받는 한사람으로 꼽혀왔다. 온화하고 가정적이고 남을 우선 배려하는 그의 성격은 미국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상징적인 가부장으로 화제가 되었었다. LA의 4.29폭동 때 그가 코리아타운을 방문해 한인들을 위로하던 모습은 한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성추행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평생 쌓아온 덕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셈이다.


할리웃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사건 이후 “나도 당했다”는 의미의 ‘Me Too’ 캠페인이 지금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다. 이 캠페인은 미국 영화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시작한 것인데 시작 하루만에 8만명의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 경험을 폭로했으니까 여성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하비 와인스틴이 누구인가. 할리웃에서는 거물 중의 거물이다. ‘반지의 제왕’ 등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었고 민주당에 정치헌금도 거액을 내놔 힐러리 클린턴과도 매우 가깝다. 그런데 추문 케이스는 헤아릴 수도 없고 강간 등 성폭력 사건으로 고발당한 것만도 80건이 넘는다. LA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는데 몇 건만 사실로 밝혀져도 그는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형편이다.

‘와인스틴 후유증’은 미국뿐만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국방장관이 성희롱에 관계되어 사직했으며 한국에서도 한샘, 성심병원, 현대카드 등 직장 내 성희롱, 성폭행이 사회문제로 떠올라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국무회의에서 “공공기관에서 성희롱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 기관장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을 정도다. 문 대통령은 한국에서 성희롱 피해자가 직장 내 공식기구를 통해 해결한 케이스는 0.6%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당했으면서도 참고 넘어간 사람이 78.4%라는 것이다.

왜 한국에서는 피해자가 피해를 입고도 고발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날까.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직장 내에서 성추행 당하면 피해자가 어딘가 허술함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피해여성이 성희롱을 고발하면 남성이 다수인 직장 내에서 왕따를 당하기 쉽다. 잘못하면 직장을 잃기 쉽다는 두려움 때문에 참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가 바뀌고 있다. 21세기는 여성들의 분노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는 성희롱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들이 차별대우에 분노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남성들이 깨달아야 한다. ‘여성 분노시대’는 ‘남성 반성시대’를 잉태하고 있다.

<이철 고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