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지의 특권

2017-11-06 (월) 12:00:00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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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특권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내게는 고민이나 힘든 일을 나누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내게 마음을 터놓아 주고 나를 전적으로 신뢰해 준다니, 마음이 고마워서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을 찾아서 해 줄 수 있도록 항상 귀를 기울여 듣고 상담해 준다.

마음이 힘든 사람들과 여러 번 얘기하다 보면, 그 사람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렴풋이 보인다.

저마다 등에 가지각색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 모양도 색깔도 무게도 크기도 각자 다른 십자가.


부모님과 사이가 틀어졌거나, 가난에 허덕이고 있거나, 법적인 분쟁에 휘말리거나, 가족 구성원이 사고를 쳤거나, 직장에서 갑질을 당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대응할 수 없어 마음 앓이를 하기도 한다.

저마다 등에 지고 오는 십자가를 보면 한숨이 났다가, 마음이 쓰렸다가, 어떻게 저런 십자가를 감당할까 싶어 경외감이 들었다가, 어떻게 해 줘야 약간이나마 기운을 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누구도 타인의 십자가를 대신해서 들어줄 수는 없다. 친밀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도, 타인이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마음이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 주고, 지친 몸을 쉬도록 물을 떠다 주고, 다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는 게 전부다.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잠시 동안이라도 힘든 일을 잊고 다시 걸어갈 에너지를 얻었다면, 타인에게서 받을 수 있는 건 이미 전부 다 받은 거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묵묵히 이고 가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지 않고, 혹은 알고도 모르는 척 하며, 위로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 볼만한 여유가 없으니까.

한부모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친구에게 어제 부모님이 싸워서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나, 취업이 잘 되지 않아서 좌절하고 있는 후배에게 상사에게 시달린 걸 토로하는 사람이 그렇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기 때문에 휘두를 수 있는 무지의 특권이다. 다른 사람이 지고 가는 십자가의 무게가 보이지 않거나, 아예 가늠해 보려고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가 제일 무겁다. 그러나 타인의 십자가도 무겁긴 마찬가지다.

이 무지의 특권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다채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내게 이 특권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를 되짚어 보고, 또 내가 이런 특권을 혹시나 휘두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고, 또 소진되고 있는 내 자신을 토닥여 보기도 했다.

특권을 휘둘렀던 사람들에게 향했던 맹렬한 질투도 떠올랐고, 동시에 내가 가진 특권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정리해 보기도 했다.

힘든 일을 터놓을 때는 상대방의 상황이 어떤지, 상대방이 내 고민을 들어도 마음이 상하지 않을지 먼저 가늠해 봐야 한다. 친밀한 상대에게 무지의 특권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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