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여보세요

2017-11-03 (금) 12:00:00 양안나(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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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 고운 뒤뜰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모르는 이에게 걸려온 전화 화면을 바라본다. 필요한 전화번호를 전화기에 저장해두어 벨이 울림과 동시에 이름이 뜨면 다정하게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며 대화를 시작한다. 입력되지 않은 번호의 벨이 울려 받지 않고 기다리면 필요한 경우 보이스 메일에 음성을 남겨놓기 때문에 보이스 피싱을 방지할 수도 있다.

90년대 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 내리자마자 내 등 뒤에서 누군가 여보세요 라는 소리에 나를 부르는 줄 알고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겸연쩍어했던 기억이 난다.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버스 안에서 그 조그만 물건으로 옆사람이 들리게끔 큰소리로 사생활을 얘기해도 그것이 공중도덕에 폐가 된다는 생각보다는 신기함과 편리함을 부러워했었다. 그 당시 미국에선 휴대전화가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때까지 만져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급속도로 진화된 이 얇은 요술 상자는 대화보다 손가락이 사푼사푼 굴러다니며 문자로 상대방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단축된 문자와 이모티콘으로 간단명료하게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데 사용되는 언어가 단축되거나 실종되어 기계문명이 만든 테크닉 속으로 속속 빨려 들어가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화상으로 서로 마주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나 여기 이렇게 잘 살아있음을 잠깐 알린 채 주인공들은 손바닥만한 상자 속으로 들어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자마자 헤어지는 기분이다.


최근에는 상대방을 배려하여 어느 시간에 전화해도 되느냐고 문자로 확인한 후에 전화를 건다. 때로는 수다가 길어지기도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가 문자보다 더 좋은 것은 그 속에서 한숨과 울음과 웃음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 해도 두 달 후면 지난해가 된다. 낙엽 진 가을 벤치에 앉아 미술관에서 사 온 그림 엽서의 주인공처럼 우수에 젖거나 부드러운 미소로 여보세요, 헬로, 잠깐 시간을 내어 사랑하는 사람의 삶에 지친 목소리나 명쾌한 웃음소리를 들어보자. 상대방의 아픈 사연을 진지하게 들어주며 내 슬픔도 울먹이며 얘기할 가까운 벗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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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나씨는 대구 출생으로 상수리 독서모임 회원, 버클리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안나(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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