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러시아 늪’

2017-11-02 (목) 박 록 주필
작게 크게
예정대로라면 이번 주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승리의 빅 위크’가 되었어야 했다. 대망의 감세안 공개를 선두로,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연방준비제도 차기의장을 지명한 후, 금요일엔 북핵 위기 속에 12일간의 아시아 순방을 떠나는 ‘쾌청한’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먹구름과 함께 기후가 급변했다. 새 주가 시작되면서 전국의 눈길이 쏠린 것은 트럼프의 발목을 잡아끄는 ‘러시아 늪’이었다.

2016년 미 대선에 러시아 개입 의혹을 수사해온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가 수사 착수 불과 5개월 반 만에 첫 기소를 발표했다. 새 행정부를 출범 전부터 휘청대게 했던 러시아 악몽이 다시 트럼프 백악관을 덮치고 있는 것이다.

뮬러는 30일 트럼프 대선 캠페인의 본부장과 부본부장을 역임했던 폴 매너포트와 릭 게이츠를 12가지의 범죄혐의로 기소했다. 수천만 달러의 돈세탁과 소득 허위신고 및 탈세, 미등록 불법 로비, 미 국익에 반하는 음모 등 유죄 평결의 경우 최고 15년 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 혐의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트럼프 진영에 합류하기 몇 년 전 사안들로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 정부의 공모 증거는 아니다.


‘부패한 워싱턴의 쇄신’을 부르짖어온 대통령의 인선 안목이 민망스럽게는 되었지만 그들의 기소장에는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 연루 의혹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이들 기소에 대한 백악관의 첫 반응도 일단 ‘안도’였다. “트럼프와는 관계없다”며 거리두기 정도로 대응했다.

그러나 1시간 후 세 번째 기소가 ‘깜짝’ 발표되었다. 사전형량 협상을 거쳐 유죄를 시인하고 특검과 협조하기로 동의한 조지 파파도폴로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트럼프 캠프의 외교정책 자문이라는 직책을 가졌던 그는 러시아 측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흠집을 낼만한 수천건 이메일을 갖고 있다면서 접촉해온 런던의 한 ‘교수’를 만났으며 이 사안에 대해 지난 1월 연방 수사관에게 위증했음을 시인했다. 그는 이 접촉을 캠프 고위층에 보고했고 트럼프와 푸틴의 만남 주선을 시도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매너포트 혐의와는 달리 파파도폴로스의 경우는 공모 관련이었다. “이것이 공모 증거가 아니라면 무엇인가”라고 듀크 법대 새뮤얼 부엘 교수는 반문한다.

매너포트 기소 소문은 지난 주말부터 워싱턴에 파다했다. 백악관도 대응 전략을 논의하며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파도폴로스의 유죄 시인과 기소는 예상조차 못했다고 폴리티코는 전한다.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백악관 내의 첫 반응은 “도대체 그가 누구야?”였다고 한다. 당혹한 백악관은 파파도폴로스 폄하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를 “무보수 하급 자원봉사자” “커피 보이” 등 막말로 ‘듣보잡’ 취급하기엔 그에 대한 트럼프의 언행이 기록으로 반박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선 ‘뛰어난 인재’로 자랑을 늘어놓았고 10여명만 참석하는 외교정책 회의에 함께 앉았던 사진도 남아있다.


이날의 깜짝 발표는 뮬러 특검의 전략으로도 분석된다. 기소 발표 전부터 ‘뮬러 해임’ 촉구 등 거센 비판을 쏟아내는 보수진영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들의 주장을 약화시키기 위한 ‘폭탄’을 준비했다는 시각이다.

첫 기소 발표에 “NO COLLUSION!(공모는 없다!)”이라고 비명 같은 트윗을 쏟아냈던 트럼프는 특검수사 전개에 상당히 분노하며 수사가 금융관련 문제로 확대되면서 “자신과 가족에게 타격을 줄까 불안해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트럼프의 방침은 일단 특검 수사 불간섭 쪽으로 기울고 있다. 수사를 중단시킬 방도가 별로 없다는 것을 백악관이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폴리티코는 지적한다.

특검수사를 막을 수 있는 트럼프의 옵션은 극히 제한적이다. 뮬러를 해임시킨다면 트럼프는 제임스 코미 전 연방국장 해임보다 더한 사법방해 혐의에 휩싸일 것이다. 수사 지원 예산의 돈줄을 막아버리는 것은 공화당 의회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사면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돈세탁과 탈세 등 중범혐의자 사면은 정치적 재난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칫 탄핵추진의 불씨를 살려줄 수도 있다. 힐러리 진영의 러시아 내통 의혹을 수사해야 한다면서 맞불 작전을 쓸 수도 있다. 주의를 분산시키거나 또 하나 특검팀을 꾸릴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뮬러의 수사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뮬러의 수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멀고 험한 여정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 지금은 아무도, 뮬러 자신까지도 알지 못한다. 중형 위기에 처한 매너포트는 사면을 기대하며 버틸 수도 있고 마음을 바꿔 특검에 협조할 수도 있다. 조지 워싱턴 법대 랜덤 일리아슨 교수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뮬러의 메시지를 잠재적 기소 대상자들을 향한 경고로 풀이했다 - “조지처럼 와서 협조하고 형량을 거래하라. 만약 수사를 방해하면 당신도 매너포트 신세가 될 것이다”

다음 기소대상은 누구일지, 어떤 폭탄이 터질지…대통령의 사위 재럿 쿠슈너와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 전 안보보좌관 마이클 플린의 이름들이 불안하게 떠도는 ‘러시아 늪’에서 무사히 헤어나기 위해 트럼프 백악관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는 요즘이다.

<박 록 주필>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