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 FRB마저 트럼프화 할까?

2017-10-16 (월)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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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FRB마저 트럼프화 할까?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떠도는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렉스 틸러슨은 연방국무부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은 물론 조직 자체를 거의 무용지물의 단계로 끌어내렸다.

톰 프라이스 연방보건복지부 장관도 비슷한 과오를 범한 후 일찌감치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런가하면 스캇 프루위트는 연방환경보호청의 업무 중 ‘보호’ 측면을 신속히 제거했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 전반에 걸쳐 유사한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 마디로 트럼프는 행정부를 휩쓴 5등급 허리케인과 같은 존재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쑥대밭이 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은 자주 질문을 하지는 않지만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에도 이와 비슷한 사태가 발생할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세계경제에 얼마나 큰 재앙이 될지 내심 궁금해 한다.

미국의 금융정책을 결정하는 FRB는 가장 중요한 경제기구다. FRB 의장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지닌 경제 관리다. 금융문제에 관한 한 대통령보다 힘이 세다.

FRB의 위상은 특이하다. 행정부에 소속된 정부기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독립기구도 아니다.

FRB 이사는 대통령의 지명과 의회의 승인을 거쳐 임명되지만, 전통적으로 당파 정치와 거리를 둔 기술관료의 위치에 설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 요구사항이라기보다 규범(norm)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는 트럼프 시대의 규범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잘 안다.

지난 10여년간 FRB는 벤 버냉키와 자넷 옐렌 등 두 명의 탁월한 경제학자가 통솔했다. 이들처럼 재계 경험이 전무한 학자들이 현실세계의 경제 문제들을 어쩌면 그리도 탁월하게 처리해왔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특히 의회 및 우파진영의 심한 훈수와 간섭에도 불구하고 3세대 만에 찾아온 경제위기에 능률적으로 대처했다. 그리고 그들의 지적, 도덕적 용기는 그 이후에 전개된 상황에 의해 입증됐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면 임기가 끝나가는 옐렌이 FRB 의장직에 재임명되거나, 최소한 그녀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기술 관료가 FRB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등용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늘 최악을 예상해야 하는 트럼프 시대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트럼프가 금융정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가정해도 무방하다.

이 문제에 관해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입장을 밝혔지만, 그의 말에는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

어느 날엔 낮은 이자율이 경제성장을 부추긴다고 했다가, 다음 날엔 중산층의 소득을 해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정책적 견해를 토대로 연준 의장에 누구를 낙점할지 점치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트럼프는 다른 각료들을 임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의회 공화당 지도부에 공을 넘길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공화당 의회 지도자들이 금융문제에 관해 올바른 답을 내놓은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쳤을 당시 FRB의 공격적인 통화팽창 개입은 필수적이었다. 뭉뚱그려 말하자면 거액의 돈을 찍어내는 것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통화팽창이 인플레를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문제와 씨름해온 버냉키와 기자(폴 크루먼)를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은 당시 상황이 통화팽창이 일어났던 시기의 일반적 상황과 크게 다르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FRB가 통화 베이스를 네 배나 확대했는데도 불구하고 물가는 전혀 요동치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 지도자들은 금융위기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FRB의 조치를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다. 특히 아인 랜드의 소설에서 금융정책의 아이디어를 얻는 폴 라이언 연방의회 하원의장은 버냉키가 달러의 가치를 떨어뜨려 인플레 고공행진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기 FRB 의장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존 테일러와 함께 쓴 글에서 라이언은 FRB의 통화확대를 “오바마의 재정정책을 살리려는 정치적 동기를 지닌 시도 가운데 일부”라고 지적했다.

FRB의 통화정책이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를 거듭한 사람들 중에 그들의 견해가 틀렸음을 인정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고, 그 같은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은 사람 역시 전무했다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이는 공화당 의원들이 차기 FRB 의장 선정에 큰 역할을 맡을 경우 과거 10년간 계속 틀린 답을 내놓았던 인물을 강력히 추천할 것임을 의미한다.

차기 의장 유망주로 널리 거론되는 케빈 와시 전 FRB 이사도 공화당의 기준에 부합되는 인사다.

그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인플레이션을 강력히 경고하며 통화정책을 비롯, 10%대의 실업률에 대항하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해선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인 바 있다. 당시 그는 미국이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국가부도의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누차 경고했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된 후에도 와시는 자신의 예측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질책을 당하지도 않았다.

트럼프가 차기 FRB 의장으로 누구를 지명할지 알 도리가 없다. 가끔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니, 혹여 똑똑하고, 깊은 식견을 지닌 정직한 인물이 기용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개연성에 불과할지 몰라도 FRB가 다른 정부기관처럼 트럼프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역량과 전문지식을 갖춘 미국 정책결정의 마지막 보루마저 조만간 품격과 기능을 상실한 다른 정부기관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다음번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결코 희희낙락하지 못할 것이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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