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법정에 선 ‘게리맨더링’

2017-06-22 (목)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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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연방대법원의 계절이다. 전년 10월 초에 시작된 1년 회기 수십건 케이스 중 보통사람들의 일상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줄 주요 판결들이 대부분 6월 중순을 넘어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주목할 만큼 이번회기 최대 케이스는 트럼프 행정부의 ‘반 이민 행정명령’ 소송이지만 6월 중 판결은 일정상 불가능하다. 오늘 비공개 회의를 통해 언제 처리할 지에 대한 일정발표가 나올 것이다. 여름 특별회기를 열 수도 있고 가을 회기까지 미룰 수도 있다.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트럼프 대통령의 좌충우돌 행보에 매일이 시끌시끌한 요즘의 워싱턴이지만 금년 연방대법원은 ‘성수기’에 들어선 6월에도 비교적 조용하다.


이번 주 들어 ‘찢어진 눈’이라는 뜻의 ‘슬랜트’를 연방 상표등록국에 밴드이름으로 등록하려다 인종비하를 이유로 거부당했던 아시안 록밴드에게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승소를 안겨준 만장일치 판결 등이 나왔고, “교회학교에 대한 정부기금 지원거부는 종교적 차별인가”에 대한 결정이 곧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정도다.

금년 대법원에서 나온 최대의 결정은 ‘판결’이 아니었다. ‘게리맨더링’의 위헌 여부를 다음 회기에 심리할 예정이라는 지난 19일의 발표였다. 미 전국에 뿌리내린 오래된 정치 ‘전통’의 하나이지만 정계의 양극화와 교착상태를 부추기는 ‘고질’로 비판받고 있는 게리맨더링이 위헌 판결로 무효화 될 경우 미 선거지형이 바뀔 만큼 엄청난 파급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서다.

도대체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이란 무엇인가. 옥스퍼드 사전은 ‘한 정당이나 집단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조작하는 행위’라고 풀이한다. 19세기 초 매사추세츠의 엘브리지 게리 주지사가 자신이 속한 민주-공화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다시 획정했는데 얼마나 무리하게 했던지 선거구의 모양이 도롱뇽을 닮은 전설 속의 괴물 샐러맨더와 비슷해지자 당시 언론이 ‘게리맨더’라는 합성어를 만들어 풍자한데서 시작되었다. 태생부터 부정적 이미지를 안고 있다.

미국에선 매 10년마다 센서스의 결과에 따라 선거구를 재편한다. 인구의 증감을 반영하여 각 선거구 내에 비슷한 숫자의 주민들이 포함되도록 선거구의 경계를 새로 긋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에선 주 의회가 재획정 작업을 주도하므로 그 과정에서 당파적 이해관계가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민주·공화 양당이 다 이용해온 관행이지만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애틀랜틱지의 지적처럼 자신의 재선과 자당의 주도권이 최대 목표인 정치가들에 의해 재획정은 “규정도 없고, 심판도 없고, 제한도 없는 뒷골목 싸움처럼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것”이다.

거기에 테크놀로지 발달에 의한 소프트웨어 개발로 선거구의 모양은 덜 기괴해지면서 특정 정당이 주 의회뿐 아니라 연방하원 의석을 늘려가는 데도 엄청난 혜택을 주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선거구를 자당에 유리하게 획정한다는 것은 정치가가 유권자를 입맛대로 고른다는 말과 같다. 게리맨더링 선거구에선 유권자들의 영향력이 줄어든다. 현직은 쉽게 재선되고 재선된 의원들은 선거구민 모두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성향이 다른 유권자들이 골고루 섞인 경쟁적 선거구가 되어야 정치가들이 다양한 보이스에 귀를 기울일 텐데 그 균형이 무너지니까 당의 경선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경선 승리가 본선 승리로 이어지는 선거환경에서 정치가들은 국익보다 당익을 우선시하는 당파성을 강조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이런 정치가들의 양산이 양극화와 교착상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의 게리맨더링 심리 결정은 이런 부정적 정치 관행이 바뀔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올 가을에 시작되는 새 회기에 다룰 케이스는 위스콘신 주 의회 선거구 획정에 대한 위헌 소송이다.

소송은 2010년 공화당이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위스콘신 주 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비롯되었다. 공화당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획정했고 그 결과로 2012년 선거에서 전체득표율은 48.6%에 그쳤으나 전체 99개 의석 중 60석을 차지하는 ‘작전 성공’을 거두었다. 2014년에도 52% 득표로 63석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지난 11월 연방 항소법원은 수정헌법 1조와 14조에 명시된 (민주당) 유권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했음을 인정하며 도를 넘어선 공화당의 게리맨더링에 위헌 판결을 내렸고 위스콘신 주는 연방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했다.

게리맨더링이 연방대법원 법정에 선 것이 처음은 아니다. 벌써 여러 차례다. 이미 대법원은 소수계 유권자에게 불리하게 획정된 선거구 플랜에 대해선 인종차별을 근거로 위헌판결을 내린바 있다. 그러나 아직 특정 정당에게 유리하다는 당파적 이유를 근거로 한 소송에 대해선 판결한 적이 없다. 대부분 기각 시켰다.

대법관 사이에서도 당파적 게리맨더링은 순전히 정치적 문제여서 법원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보수파의 의견과 이제는 도를 넘어선 게리맨더링에 대해 위헌 여부를 가려 유권자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할 때라는 진보파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태다.

어렵게 연방대법원 법정에는 세웠지만 게리맨더링에 브레이크를 거는 투쟁의 앞날은 별로 장밋빛이 아니다.

5대 4로 보수가 우세한 대법원은 공화당이 불리해질 후폭풍을 개의치 않고 게리맨더링의 고삐를 잡아줄 것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사람은 이번에도 한 명뿐이다. 스윙보터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 - 그의 의중을 미 정계가 숨죽이며 주시하게 될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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