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니라는 존재

2017-05-06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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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사랑을 가르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친다. 다른 존재를 조건 없이 품어 안는다는 점에서 같지만, 불교의 자비는 자(慈)와 비(悲)로 보다 구체적이다. ‘자’는 이로움과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비’는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이다.

석가는 “마치 어머니가 목숨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한량없이 사랑하는 마음이 자비라고 했다. 어머니가 자식을 먹이고 입히며 그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마음이 ‘자’, 고통 받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비’이다. ‘자비’의 세월로 여성은 어머니가 된다.

남가주에 사는 74세의 주부 P씨는 삶의 절대적 요소로 ‘희망’을 꼽는다. 70대 중반에 새삼스럽게 무슨 희망일까 싶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의 이면은 절망. “희망은 있는 걸까?” 회의가 들며 절망이 슬금슬금 다가올 때 우리는 희망을 부여잡는다. 그가 희망에 의지해 살아온 세월이 20여년이다.


그의 삶은 1994년 3월4일을 기해 바뀌었다. 미국에 유학 중이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 그날 이전까지, 삶은 안락했다. 정형외과 의사로 병원을 운영하던 남편은 자상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 남매는 총명하게 잘 자라 80년대 중반 고교생이던 아들과 중학생이던 딸을 일찌감치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그때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쳐 가족의 삶을 뿌리째 뽑아버린 것이 아들의 사고였다.

부부는 한국 살림을 정리하고 아들 곁으로 왔다. 이후 그의 삶에서 그 자신은 사라졌다. 처음, 허리도 펴지 못하고 흔들거리던 아들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텨서 휠체어 타고 자동차 운전하며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가 아들의 손과 발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결과, 한뼘 한뼘 너무도 느린 변화를 인내하고 인내하며 얻어낸 결과이다.

그 세월, 속으로 눌러온 한숨과 눈물, 비명이 얼마일까. “전생에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아들이 이런 일을 당했을까”하는 자책은 지금도 여전하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들은 걷지 못하고 옴짝달싹 못하는 하반신은 종종 욕창으로 살이 썩어 들어간다.

한시도 쉴 틈 없이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용변 돕고 씻기는 동안 50대 초반 주부는 노인이 되었다. 노동량 자체가 이제는 힘에 부치지만, 그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란 ‘자식을 위해서 못할 게 없는 사람’,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 오늘도 그를 버티게 한다.

오랜 전 샌프란시스코의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었다. 그분은 원수 같이 미운 아들과 그런 아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아내 이야기를 했다. 그의 아들은 중학생 때부터 마약에 손을 대더니 20대 중반에 이미 전과 5범이었다. 자동차를 비롯해 집안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었다. 그때도 아들은 교도소에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한번도 면회를 거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내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그는 전화를 한 것이었다. 아내의 포기를 모르는 ‘어머니 사랑’은 사람들을 변하게 했다고 한다. 우선 아들이 변해서 마음을 잡았고, 그 역시 아들에 대한 마음이 바뀌었다, 분노와 미움 대신 “그 놈도 내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고 했다. 사랑이 위대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모성애’ 하면 신라시대 혜통 스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삼국유사에 담긴 정신이 번쩍 드는 전설이다.


스님이 출가하기 전 어느 날이었다. 산기슭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가 보여서 별 생각 없이 잡아 삶아 먹었다. 추려낸 뼈는 동산에 버렸는데 다음날 새벽에 나가보니 뼈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점점이 핏자국이 이어져 따라가 보니 수달의 굴이었다.

죽은 수달은 어미였다. 뼈만 남은 어미가 굴 안에 남겨진 다섯 마리의 새끼들을 품어 안고 있었다. 죽어서도 갓 난 새끼들을 보호하려는 어미의 절절한 본능에 그는 큰 깨달음을 얻고 출가를 결심 했다고 한다.

“목숨이 있는 동안은 자식의 몸을 대신하기를 바라고 죽은 뒤에는 자식의 몸을 지키려는 것”이 어머니 마음이라고 불경은 말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에서 어머니는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서 자식에게 먹이는 존재이다.

어머니날이 다가온다. 모든 존재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자’와 ‘비’의 자비심이 존재를 살찌운다. 그리고 삶의 어느 불행한 모퉁이에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그 존재를 들어 올리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 자신을 잊을 정도로 가없는 자비심이다.

어머니는 절망의 우물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존재, 칠흑 같은 어둠을 촛불 하나의 희망에 의지해 헤쳐 나가는 존재이다. 그런 어머니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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