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어머니의 빈자리

2017-05-03 (수) 05:03:39 김영란(북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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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리 중 나왔다며 둘째 언니가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둘째, 셋째 언니가 뒷줄에 서 있고,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흰 칼라 교복을 입은 내가 앞줄 어머니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족히 40년은 넘은 사진이다. 나와 맞닿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의식적으로 애써 외면해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봇물처럼 눈물로 터져버렸다. 장녀로서 어머니와 더욱 애틋했을 큰 언니가 ‘너무 슬퍼 엉엉’이라 답했고 남은 셋도 ‘너무 슬프다’고 썼다. 살아갈수록 두터워가는 어머니의 정이 아쉽고, 받기만 하고 갚지 못 한 죄책감과 회한으로 모두 오래 눈물 흘렸으리라.

어머니는 전쟁의 수난 속에 하나 뿐인 큰 아들을 잃고 오랫동안 매 아침 임자 없는 더운 밥그릇을 안방 아랫목에 묻어두셨다. 생활력이라고는 전혀 없으신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사기까지 당해 고생하셨다. 가족의 버팀목이었으나 네 자매가 의지하기엔 턱없이 천진난만했던 어머니, 남에게 살림을 맡겨놓았던 터라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특별한 음식이나 맛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분 냄새를 맡아본 적도 없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추는 것을 본 적도 없으니 다른 어머니처럼 시대를 잘 타고 났다면 날렸을 끼나 재능 또한 없다.

마음이 넉넉하셔서 누구에게 따지거나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야단맞은 생각도 돌이켜보면, 이른 아침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빗자루를 들고 일어나라고 재촉하던 모습이 고작이다. 험한 세상을 살아내기엔 버거웠던 여린 비극의 주인공이었지만, 고비마다 마법의 수호천사처럼 긍정적으로 딸들을 다독이고 때론 엉뚱한 유머로 때론 소녀 같은 감성으로 달래주어 우리의 슬픔을 견디게 했다.


신이 이 세상에 다 있을 수 없어 만들었다는 어머니, 딸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그동안 어머니가 걷던 길을 따라잡고 보니, 고독했을 어머니의 청춘과 한 그리고 밤마다 쑤시는 다리를 두드리던 육체의 고통이 내 몸처럼 아프게 느껴진다. 해가 더할수록 커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만큼 여자로서 어머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며 올 어머니날엔 어머니께 작년보다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보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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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씨는 <북산책>출판사 대표이자 미주 초기 이민사 연구자이다. 저서로는『하룻밤에 읽는 미국 첫 이민 이야기』,『책으로 보는 세상』,『조국과 여성을 빛낸 불멸의 별 김마리아』가 있다.

<김영란(북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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