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2017-04-12 (수) 12:00:00 이현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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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배가 침몰했을 때, 나는 디즈니랜드에 있었다. 줄이 긴 라이드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뉴스 속보들이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라앉은 배 안에서 생존자를 구출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아직 스러지지 않은 시각이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오고, 라이드에 탑승했다. 그런데 그게 하필 바다와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한 <캐리비안의 해적>이었다. 보트를 타는 내내 백골이 된 해적 인형들이 노래를 불렀다. 요-호. 나는 빌어먹는 불한당, 그래도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눈물이 났다. 박완서의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김현승의 시, <눈물>의 한 구절에서 그 제목을 따 왔다.

소설은 학생 운동의 와중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을 그렸고, 시에서는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시인이 자신의 존재가 오롯이 눈물, 즉 순수한 슬픔의 결정체가 되었음을 절대자 앞에 고백한다. 두 작가는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슬픔이 자식을 잃은 부모의 그것임을 체감하였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박완서의 소설은 참척의 슬픔에 시대적 암울함이 겹친 이중의 고통이 드러나 더욱 아프다.


소설 속의 어머니는 말한다. “중요한 건 창환이가 운동권이었는가 아니었나가 아니라, 죽음까지 횃불로 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시대가 깜깜했다는 거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그 깜깜함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이다. 요즘 탄핵 정국에서도, 대선 정국에서도 세월호 참사가 빠지지 않아 왔다.

죽은 자식의 유골이라도 수습하고 싶다는 유족들을 반정부적인 세금 도둑 취급하질 않나, 대권을 겨냥한 이미지 만들기에 세월호의 비극을 덧씌우지를 않나, 불편하기 짝이 없다. 1073일만에 물 위로 올라온 선체는 만신창이였고, 유족들의 마음 역시 그러할 것만 같다.

슬픔을 비난하지 말라, 슬픔을 이용하지 말라. 304명의 죽음을 무언가의 수단으로 삼는 사회는 비인간적이다. 소설 속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횃불로 삼은 어두운 시대에 눈물을 참아야 했지만, 절벽처럼 묵묵히 그녀의 절규를 듣고만 있던 제3자의 눈물 앞에 무너진다.

눈물의 연대는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비극 앞에 우리가 가장 나종 지녀야 할 자세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현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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