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실리콘밸리

2017-03-29 (수) 12:00:00 이현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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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거주하고 있는 월넛크릭은 실리콘밸리의 중심부라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주민들이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주변의 IT 기업들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다. 우리의 이웃들은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의 이름값 높은 회사들에서 일하기도 하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스타트업들에 투신하여 대박의 꿈을 꾸기도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얌전한 분위기였던 월넛크릭 다운타운에서도 작은 맥북을 들고 다니며 코딩을 하거나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카페에서 회의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젊고 역동적인 분위기가 신선하게 느껴져 좋긴 하지만, 우리 부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금융 회사에 근무한다. 완벽한 복장자율화가 실행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테크 회사들과는 매우 상반된 분위기의 보수적인 곳이다. 다행히 리버럴한 동네 분위기 탓에 수트에 넥타이까지는 아니지만, 치노 팬츠와 드레스 셔츠, 옥스포드화를 신고 출근한다.

그가 일하고 있는 경영전략실은 대부분 전통적인 경영 컨설턴트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고, 고만고만한 모범생들이 정시에 출근해 야근까지 한다. 출퇴근 시간과 재택근무 여부를 자유롭게 선택 가능하다는 테크 회사들과는 영 딴판이다. 그는 이번 주말에 서른두 살이 되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어린 나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새로운 도전이 불가능한 나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생일을 기념하며 몇 병의 샴페인으로 건배를 하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어떤 발견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모험가는 아니지만 꼰대도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내가 알던 것과 다른, 스치듯 내보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평소 그가 실리콘밸리 주민들의 흥망성쇠를 면밀히 관찰하며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 같은 것일 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지역의 분위기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미래가 보장된 사람마저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무모한 것을 가장 경멸하는 사람에게도 승부사의 영혼이 싹트게 하는 어떤 것이 공기 중을 떠돌며 욕망을 자극한다.

그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마음속에도 뿌리를 내려,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는 포식자를 키우고 있었다. 참으로 낯선 풍경이다.

<이현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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