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싸라기 같은 내 시간

2016-12-07 (수)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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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서 새 달력을 받았다. 엊그제 달력을 받은 것 같은데 또 한 해가 저물었다. 시간의 속도는 자기 나이에 마일만 붙이면 된다고 한다. 65세면 시속 65마일로 시간이 달리는 것이다.

뉴욕 주 서포크에 사는 스미스 씨가 아침 출근하려니까 자동차의 배터리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였다. 이튿날 집 앞에 새 배터리와 함께 편지가 놓여 있었다. “너무 급해서 댁의 배터리를 빼서 썼습니다. 사죄의 뜻으로 새 배터리와 뮤지컬 표 두 장을 드립니다.”스미스 씨는 매우 기분이 좋아져서 새 배터리를 달고 부인과 함께 맨하탄에 가서 뮤지컬도 보고 저녁도 먹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을 비운 사이에 도둑을 맞았다. 편지 쓰기를 좋아하는 도둑인지 또 쪽지가 있었다. “값나가는 물건이 많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거실의 큰 기둥시계만은 손을 안 댔습니다. 남의 시간까지 도둑질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우리도 시간을 많이 도둑맞는다. 허송세월이란 말이 도둑맞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남들이 내 시간을 도둑질 해가는 것보다는 나 자신이 시간을 도둑질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은 기다리는 자에게는 너무나 느리다. 시간은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너무나 빠르다. 시간은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길다. 시간은 신나지 않은 자에게는 너무나 지루하다. 그러나 시간의 귀중함을 정말 아는 사람에게 시간은 한 알 한 알이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보물이다.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엄청 귀중하다.


시간은 저축이 안 된다. 시간을 맡아주는 은행은 없다. 시간은 자손에게 물려줄 수도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시간을 살 수 있는 백화점은 없다. 운동경기에서는 작전을 세우기 위하여 ‘타임아웃’을 불러 시간의 진행을 잠시 중단시킬 수 있지만 인생 경기장에는 ‘타임아웃’이 없다.

시간은 택시의 미터 같아서 타고 있는 사람의 사정과는 아무 관계없이 계속 돌아간다. 사실 산다는 것이 시간을 살기 때문에 시간은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금싸라기 같은 시간, 아껴 쓰고 값지게 쓰고 남김없이 쓰자.”는 평범한 한 마디를 한해의 좌우명으로 삼고 70%만이라도 실천할 수 있었다면 2006년은 대성공일 것이다.

시간에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달력상의 시간(Calendar time)이다. 이것은 천문학적 시간으로서 지구의 회전과 태양과 관계된 것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짐으로 결정되는 시간이다.

둘째는 생물학적 시간(Biological time)이 있다. 이것은 모든 생물 속에 부착되어있는 시간(built-in time)으로서 기러기가 옮겨가고 연어가 이동하여 알을 까고 사람이 낳고 죽고 하는 시간이다. 달력의 시간을 ‘남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생물학적 시간은 ‘나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에는 이것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시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이다. 나의 시간이 제한된 데 비하여 하나님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보통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시간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시간을 산다는 것은 달력의 시간이나 생물학적 시간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계에 나의 인생을 맞추어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산다는 의미이다.


흑인 소프라노 마리안 앤더슨은 이것을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로서 산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예수는 이것을 ‘거듭난 삶’ 곧 두 번째의 인생이라고 설명하였다.

실패를 정의하는 한 마디가 있는데 그것은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다. 시간이 부족해서 해야 할 일, 갖추어야 할 준비가 소홀해서 실패하였다는 뜻인데 사실은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시간 사용에 있어서 그 우선순위가 달랐을 뿐이다.

같은 24시간이지만 그 시간들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따라 후회와 만족, 실패와 성공이 결정된다.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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