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오늘이라는 하루
2016-11-03 (목) 08:01:37
이진희
아무런 생각없이 어디든 날아다니는 바람처럼 내 기억의 바람도 걸림없이 이리저리 자유롭게 넘나든다. 꿩이 유유히 날아다니고, 황금빛 물결의 눈부신 노란색의 은행나무 가로수길, 풀밭의 깜부기를 먹고 입주위를 까맣게 물들인 날, 풀꽃 반지, 팔찌 만들어 서로가 이쁘다 자랑하던, 주렁주렁 탐스러이 매달린 아카시아꽃을 입안 가득 넣고 맛과 향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둔탁한 엿장수 가윗소리 들리면 온 동네 애들이 모였고, “뻥이요” 하는 소리에 검은 무쇠덩어리가 멈추면 귀막고 깔깔대던, 한밤중 “묵 사려~”, “메밀묵 사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외침소리.
망태기 할아버지에게 안잡히려고 죽어라 애들과 달렸던 경복궁담 옆 언덕배기. 바로 그 언덕길에 커다란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 쏟아붓는 최루탄 연기로 이층 창가에 앉아 내용도 모른 채 눈물 흘렸던 일, 해바라기 많은 수돗가에 아버지께서 친구분들과 함께 길게 잡아뺀 자라목을 보고 신기해 하면서도 소리치며 도망가던 일, 이 모두 도시 한복판에서 얻은 아름다운 추억 조각들이다.
세월이 그리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억들은 늘 내 안에서 바람처럼 넘나든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의 속도는 서로의 삶에 따라 빠르게 또는 느리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이민자의 타향살이가 어느 순간 고국에서 산 날보다 더 많아진 지금, 나는 숱한 이야기들과 마주치며 또 다른 기억 조각들로 여전히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다. 日日時好日(일일시호일)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글이 있듯이 “옛날이 좋았지”, “전에는 좋았는데”라고 하는데 우리 모두는 그 옛날이 먼훗날에는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래서 훗날 오늘의 아름다운 조각 그림을 갖기 위해 주어진 오늘 하루가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열쇠를 손에 걸고도 찾고 다닐 정도로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고 또 세상은 바삐 돌아갈지언정 내 앞에 놓여있는 오늘이라는 하루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얼마나 귀한 날인가를 되새겨본다.
==
이진희씨는 숙명여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이민했으며 현재 평통위원, SF한인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