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즉흥적 친절

2016-09-15 (목) 09:09:55 김순진/ 교육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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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와 살면서 곧 알게 되는 것이, 미국사람들이 모두 훤칠한 키에 금발과 파란 눈을 한 미남 미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또 하나 발견하게 되는 것이, 미국사람들 모두가 친절하고, 매너 좋은 신사와 숙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인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예의도 상식도 내 팽개치고 증오에 찬 언행을 마구 쏟아내는 야만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갑자기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싹 가셔버리는 느낌이다.

그런데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고, 아마 선과 악이 인간성에 함께 내재해 있다가, 환경에 따라 선이 악을 이길 수도 있고 악이 선을 이길 수도 있다는 애매하지만 약간은 희망적인 결론을 내려 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난달 LA 방문을 마치고, 버뱅크 공항에서 귀가하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모르는 사람으로 부터 ‘즉흥적 친절’을 받게 된 것이 바로 그 계기였다. 공항에 나갈 때에는 늘 시간을 넉넉히 잡고 나가는데 그날따라 시간이 촉박했다. 짐 체크하는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나보다 대여섯 자리 앞에 서있는 어느 백인 여자가 나를 쳐다보더니 “너 바빠 보이는데 내 자리하고 바꿔 줄께” 라고 말을 걸어왔다.

전혀 예기치 못한 제안에, 순간적으로 얼떨떨했다가 곧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대여섯 자리를 앞으로 옮김으로써 5,6분 정도 시간 절약을 했겠지만, 시간절약보다 내 초조한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는 점에서 그 부인은 나에게 즉흥적 친절을 베풀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보다 두어 달 전에도 즉흥적 친절을 받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동네 커피점에서 커피를 사들고 나오는 길에 인도의 블록 끝에 발끝이 걸려 넘어지면서, 큰 대자로 엎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커피는 쏟아지고, 안경은 저 멀리 떨어져 나가고, 백 속에 있던 내용물은 여기저기 흩어지는 불상사였다. 아픈 곳을 살피기 전에 우선 창피한 생각 때문에 벌떡 일어나서 주섬주섬 흩어진 물건들을 주어 담았다.

그런데 어느 틈에 반대쪽에서 차를 몰고 가던 흑인 젊은이 한쌍이 차를 세우고 와서, 흩어진 물건들을 집어주면서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묻고, 집이 어딘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괜찮다는 말과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하고서야 겨우 그 사람들을 보낼 수 있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나는 두 번이나 ‘즉흥적 친절’의 수혜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모르는 사람들로 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을 받고 보니 “나는 과연 최근에 남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어 준적이 있었는가?” 하고 자문을 해보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또는 프리웨이 진입로에서 동냥하는 걸인들을 보고, “몇 달러 주어봤자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이 아니고, 조금 더 주어봤자 마약이나 술 먹는 데 써버릴 것이고, 보기에 신체 멀쩡한 사람들의 게으름을 조장하는 것이고, 잘못하면 내가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식의 안주어야 할 이유는 많고도 많았다.

그래도 기억을 쥐어짜서, 내가 잘했다고 여길 수 있는 일을 하나 생각해내고 스스로를 변명해 보았다. 감기가 들어서 며칠 외출을 못하는 이웃에게 과일 한 백을 사다 문밖에 놓고 온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져도 곤경에 처한 남을 선뜻 도와주려는 즉흥적인 친절이 존재하는 한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김순진/ 교육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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