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노래에도 발걸음을 멈추고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무수히 많듯이 오랜 시간 방 한 칸에 당당히 전시된 아기자기한 소품에는 추억을 음미할 수 있는 이야기가 곳곳에 담겨 있다.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 생활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어 준 물건들을 정리하며 몸통만 한 이민 가방 두 개에 추억을 싼다. 23kg 가방 두 개로 5년간 세월의 묵직한 마침표를 찍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되고 텅 비워진 공간 속에서 덩그러니 놓인 두 개의 마침표가 더욱 초라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들은 가방 안에 들어있지 않다. 캘리포니아의 화창한 햇빛, 땅 가까이에서 지구를 감싸던 푸르고 넓은 하늘, 여유가 물들어 있는 문화는 가방이 아닌 온전히 머리와 가슴으로 기억되고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다.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해서 받은 이국적인 느낌은 알 수 없는 향수에 이끌리던 것처럼 아련하지만 강렬한 향으로 남아있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다른 승객들과 달리 나를 둘러싼 낯선 공기를 마시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두리번두리번하던 나는 예고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였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지만 두려움보다는 직업도 나이도 환경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묘하게 나를 설레게 하였다.
과거를 꼭 숨겨야 하는 거창한 이유는 없었지만, 온전히 이곳에서 노력과 열정으로 자신을 새롭게 정의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더 나은 성취를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전의 실패와 도전을 무색하게 만드는 낯선 환경은 나를 벌거숭이로 만들었기에 새 출발을 위해 제일 먼저 호박벌(Carpenter Bee)의 뜻을 담아 캐비라는 영어 이름(Cabee)을 지었다. 몸통에 비해 작은 날개로 날갯짓을 하는 호박벌의 이야기에 자신을 투영시키며 꿈 통을 채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했고 그와 동시에 내가 인지하지 못한 채 한국에서 누렸던 것들이 오랜 시간 부모님이 갈고 닦은 내공의 혜택이었다는 사실도 고스란히 깨닫게 되었다. 조금 엇나가도 부모님이 반듯하게 쌓아온 곳으로부터 두둑한 신뢰와 지지를 받았기에 자연스레 “바른 아이” 명찰이 달려있었다. 이 전과 달리 이곳에선 얻고자 하는 타이틀을 위해 부지런히 나를 소개하고 끊임없이 다듬어야 했다. 유학 생활을 하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동안 외부활동, 학교생활, 집안일을 섭렵하며 “성실한 학생” 때로는 “억척스러운 살림꾼”이라는 명찰을 달았다.
정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작의 설렘과 이별의 아쉬움이 섞여 있는 공기로 가득 찬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을 다시 찾았다. 많은 일과 많은 만남을 겪으며 나의 노력으로 얻은 명찰들이 빛나고 있었지만, 명예롭게 느끼고 있던 명찰들이 출발하는 이 순간 무겁게 느껴진다. 선입견을 없애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맞게 또 한 번 벌거벗은 내가 되어야만 한다. 기대와 선입견 없이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보기 위해 내가 이뤘던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았다.
그러자 다음 도전을 위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지금 당장 나를 나타내줄 명찰은 없지만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은 경험들이 남아있기에 어디를 가더라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다짐으로 이곳의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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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