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딸 부잣집

2016-06-17 (금) 04:28:08 김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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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자랑을 할 것 같은 예감이다. 나는 딸 부잣집이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급. 형제 자매가 많던 우리 세대지만, 나처럼 자매가 넷씩인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딸 부잣집. 오빠는 물론이고, 언니들이 태어났을 때도 할아버지는 목욕하시고 두루마기까지 새 옷을 입으시고 아기를 보러 오셨단다. 셋째도 딸. 삼칠일 되는 날 할아버지 댁 대문 문턱을 넘으며 첫 대면을 했단다. “최씨 집안에 미인이 났구나” 막내고모는 지금도 그 말씀을 하신다. 아기 적엔 예뻤었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또 딸이라고 보러오지 않으셨던 미안함을 칭찬으로 얼버무리신 할아버지의 지혜였음을.

엄마는 친척 어르신들로부터 대놓고 핀잔을 들으셨단다. “그 배 속에는 딸도 많다”고. 하지만 “딸이라도 좋으니 많이만 낳아달라셨다”는 아버지 말씀을 곧이 곧대로 믿었던지 엄마는 오빠 밑으로 딸 둘, 나, 또 딸 둘을 생산하셨다

그 때의 무뚝뚝하고 엄하셨던 아버지들과 달리 자상하셨던 아버지는 우리의 놀이터였다. 배에 올라 타고 다리에 걸터앉아 발그네 태워달라 하고, 아버지 머리에 핀을 꽂으며 인형놀이를 하다 지치면 아버지 팔베개를 하고 낮잠을 잤다.


어쩌다 이 광경을 목격한 외할머니께서 기겁을 하셨단다. “재들 좀 말려라. 기집애들이…사위 보기 민망하다.” 아버지가 외출에서 돌아오실 때는 딸 다섯이 뛰어 나가 아버지 팔에 목에 매달리며 환영한다.

조금 늦게 나온 두 딸은 아버지 다리를 한쪽씩 잡고.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상봉같이 요란스럽던 매일의 인사였다. 지금도 아버지가 제일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꼽으시는 부분이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세수를 시켜주시며 “우리 딸들 참 예쁘다” 감탄을 하셨는데, 머리를 빗기고 옷을 갈아입히시면서도 그 감탄은 계속 되었다.

옷이 날개라고 엄마는 딸 다섯에게 특별한 날개를 달아주곤 하셨다. 계집애들에게 너무 정성을 들인다고 부러움 반 흉 반 수근대는 이웃도 간혹 있었다. 이렇게 부모님의 고슴도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니 그 말씀을 믿기로 했다. “딸 안 낳았으면 어떡할 뻔했니?!” 아버지날을 맞으며 받은 사랑과 헌신을 시침 뚝 떼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죄송하고 송구스럽다.

<김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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