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감독 박찬욱)의 '숙희(타마코)'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에서 볼 수 없는 캐릭터다. 숙희는 순수하고 용감하며 씩씩하고 솔직하며 밝다. 박 감독이 창조한 부조리한 세계는 언제나 부조리한 인물들로 채워졌지만, 숙희는 '아가씨'의 부조리(不條理)를 깨부수고 조리(條理)의 세계로 나간다. 박 감독의 말처럼 그래서 숙희는 이 작품의 진정한 승자다.
숙희를 연기한 김태리(26)는 숙희처럼 연기했다. 그의 연기가 신인치고는 나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김태리는 연기력을 떠나 당찼다. 신인 배우가 아닌데도 작품의 무게,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한 부담감, 상대 배우가 주는 중압감에 짓눌려 주눅 든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들이 다반사. 김태리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를 보는 관객이 숙희의 행보를 주목하듯 대중의 시선이 김태리를 향하는 건 그래서 어쩌면 당연하다.
"숙희는, 보석이라면 가짜와 진짜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프로페셔널함과는 다르게 자신의 감정을 쉽게 컨트롤 하지 못하는 아이죠.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고, 거기서 오는 사랑스러움이 있는 인물입니다."
김태리는 숙희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막힘 없이 이렇게 답했다. 다른 질문에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 작품을 선택했느냐는 물음에도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저한테는 저를 이끌어주는 감독님이 필요했어요. 전 신인이니까, 저한테 많은 걸 맡기는 감독님보다는 명확하게 포인트를 알고 데려가 주는 분을 원했죠. 제가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원했던 지점을 이룬 것 같아서 좋아요."
거침없는 김태리이지만, 분명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김태리는 영화배우 지망생에서 단번에 프로 연기자가 됐다. 그것도 박찬욱이라는 거장을 통해서 데뷔했다.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최소한 이 작업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길을 갔다.
"고민과 부담,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는 않았어요. 스스로 당차지려고 노력했죠. '괜찮아. 편하게 하자. 난 못해도 돼', 이러면서요.(웃음)"
김태리는 그러면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냈다. "재밌는 건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면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던 지점에서 쉽게 일을 해결할 때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는 "촬영 분위기가 잘 잡혀있을 때, 감정이 확 생기는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떠오르지 않았던 것들이 번뜩 떠오르는 순간, 그것이 연기하는 재미라고 김태리는 강조했다.
"친구랑 대학로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다 새로운 호흡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평상시에 잘 사용하지 않지만, 뭔가 자연스러운 그런 호흡이요. 그런 게 만들어지면 '아, 이거 연기할 때 어떻게 써먹지'라고 상상하죠. 그럴 때 연기가 정말 재밌어요."
개봉을 했으니 김태리가 '아가씨'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 이제 다음을 생각해야 할 때, 김태리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가 '아가씨'를 만난 것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김태리는 순간순간 만나는 것들에 맞춰 그때그때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