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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세상, 내 편 같은 영화 ‘계춘할망’

2016-05-29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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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세상, 내 편 같은 영화 ‘계춘할망’

영화 ‘계춘할망’(감독 창)의 한 장면. 2016-05-30

각종 강력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범죄자가 어떤 미디어의 영향을 받았는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요즘에는 인터넷 게임이 많지만, 과거에는 영화, 특히 스릴러 영화가 마치 '악의 교범'처럼 여겨졌다.

실제 2004년 여성 20여 명을 연쇄 살해한 뒤 사체를 훼손하고 인육까지 먹은 '유영철 사건'은 할리우드 영화 '양들의 침묵'(감독 조너선 드미), 2007년 발생한 '인천 박모 어린이 유괴 살인사건'은 한국 영화 '그놈 목소리'(감독 박진표)를 각각 모방한 것으로 드러났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가 대중의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일부 정신건강·심리 전문가는 "날로 진화하는 범죄 수법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범죄자는 몰랐던 범죄 수법을 접할 수 있다. 게다가 '약점을 보완하면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겠다'는 그릇된 자신감마저 갖게 된다" "폭력물을 자주 접하면 언제, 어떻게 상대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그런 다음 무슨 방법으로 알리바이를 만들고 범죄를 합리화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 "성인도 지속해서 폭력물에 노출되면 영향을 받는데 특히 공격 성향이 높은 사람이 폭력물을 더 자주 보는 경향이 있는 만큼 거의 모든 범죄자가 폭력물에 노출됐다고 할 수 있다" "자극에 너무 익숙해져서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면서 더욱 변태적이 된다. 보고 즐기며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던 폭력 심리를 더욱 자극받게 된다" 등의 논리도 편다.

요즘 극장가로 가보자. 국내에서 4월27일 개봉해 한 달 남짓 상영하며 약 860만 관객을 모은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 '캡틴아메리카: 시빌워'(감독 앤서니·조 루소), 12일 개봉해 약 545만 관객을 들인 한국 호러 영화 '곡성'(감독 나홍진), 25일 개봉해 5일 만에 약 121만 관객을 끈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 '엑스맨:아포칼립스'(감독 브라이언 싱어) 등 극장가를 지배하는 세 영화는 모두 다분히 폭력적이다.

4일 개봉한 뒤 경쟁에서 탈락해 약 142만 관객으로 종영을 앞둔 한국 스릴러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감독 조성희)도 마찬가지다.

'시빌워'는 직접적인 살인을 다루지 않는 히어로물이라지만, 극 중 죽는 사람은 사실 수백, 수천 명이다. '아포칼립스'는 일부 장면에서 직접적인 살인 장면도 나온다. '탐정 홍길동'은 할리우드 영화 '씬시티'(감독 프랭크 뮐러 둥) 시리즈처럼 일부 폭력 장면을 그래픽으로 처리하긴 했으나 폭력이 난무했다. '곡성'은 직접적인 살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으나 곳곳에서 유혈이 낭자해 영화를 본 일부 관객이 "이 영화가 어떻게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15세 관람가를 받을 수 있었느냐, 폭력에 너무 관대한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고, "애들과 같이 갔다 평생 기억에 남을 상처를 줬다"고 분노할 정도다.

물론 일부 영화 평론가는 "영화가 관객 정서 등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없지 않겠지만, 모방범죄로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영화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강력 범죄에 대한 두려움, 분노를 영화화해 범죄를 비판하고, 약자에 관심을 촉구하는 역할이 더 크다" 등 반박하며 영화를 옹호한다.

당연히 그 말도 옳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는 '묻지마'로, 수년간 알고 지낸 사람에게는 "무시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소중한 생명을 잃어야 하는 요즘 세상에는 영화 평론가의 '제 식구 감싸기'성 변명보다 정신건강·심리 전문가의 지적에 '좋아요'를 매기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계춘할망'(감독 창)을 보라고 권한다.

12년 만에 재회한 제주도 해녀 할머니 '계춘'(윤여정)과 손녀 '혜지'(김고은)의 이야기다.

영화가 전형적인 '신파'일 수도 있고, 어디선가 본듯한 뻔한 스토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 속에서나, 밖에서나 폭력에 지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감싸고, 보듬는다. 극장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눈시울을 붉히는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그것이면 됐다. 만듦새가 약하면 또 어떤가. 두 여배우의 명연기가 간신히 살려낸 영화라면 또 어떤가. 유명 영화 평론가가 가차 없이 혹평했으면 또 어떤가.

피로 물든 극장가에 영화 속 계춘의 대사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온전한 내 편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 내가 네 편 해줄 테니 너는 네 원대로 살라"처럼 '내 편 같은 영화'가 한 편이라도 걸려 있으면 된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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