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친구 이기택
2016-04-19 (화) 02:40:36
강우정/한국성서대학 총장
친구 이기택이 3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부음(訃音)을 미국에서 들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던 중 그가 사망하였다는 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작년 12월 성서대학의 후원의 밤에도 참석하여 축사도 해 주었는데 그 때만 해도 전혀 병약한 기색은 없었지요. 귀국하여 그의 삼우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예배를 집전하시는 목사님께서 그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상을 떠났기에 지금 주의 품안에 있다는 말씀을 듣고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 캠퍼스에서 그를 만났고 학생활동을 하면서 그와 깊이 사귀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부패, 불의, 부정은 도를 넘어 전 국민의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젊은 대학생들에게 정의의 기수가 될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학생 대표였던 우리는 여러 번 만나 서울에서의 대학생 데모를 모의하였고 4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였습니다. 4월 18일 정오 12시 H-hour. 1시간 전인 오전 11시에 학생대표들은 이사장 실로 불려 들어갔습니다. 데모 주동자들은 학칙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고 지금이라도 계획을 중단하라는 회유도 받았습니다. 이기택이는 시종일관 이 일이 우리에게 지워진 시대적 사명이라며 결행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때의 결연한 모습은 제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오늘 오후 4•19 혁명 제 56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달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4•19 행사에서 고인이 없는 식이 진행 될 거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는 4•19의 명실상부한 대표였습니다.
학교를 떠난 후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는 1967년 30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정치인으로서 고속 성장을 했습니다. 1973년쯤 이었나 봅니다. 그는 이미 중진 국회의원이었습니다. 한국일보 상항지사의 기자 겸, 발송원 겸, 가판원 노릇을 하던 나를 영사관을 통해 찾았습니다. 없는 살림에 첫 아이를 낳고 째지게 가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숨고 싶었는데... 부득부득 우리가 살던 Bush St. 아파트까지 찾아 왔습니다.
“임마야! 형님이 오시면 마중을 나와야지. 이눔아 미국에 살더니 마이 컸네” 문을 들어서며 너스레을 떨었습니다. “어디보자 이눔이 느그 상주가?” 그는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들어 올리며 “잘 생겼네, 애비보다 훨 낫네” 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따뜻했습니다. 눈물이 핑 돕니다.
캠퍼스에 벚꽃이 하루 사이에 활짝 피었습니다. 어제까지도 꽁꽁 얼어붙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만물이 다시 살아나고 꽃이 피다니 정녕 4월은 생명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왜 시인(TS Eliot)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모진 말을 했을까? 그가 전하는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겠지만 저는 4월이 새삼스레 춥게 느껴집니다. 56년 전 4월 이기택이와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거사를 결행했던 그 달은 무섭고 추웠습니다. 그리고 또 올해 4월 사랑하는 그 친구를 차가운 땅에 묻고 돌아서야 하는 이 달이 잔인하게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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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정/한국성서대학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