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왼쪽)와 알렉이 기차역에서 이별을 나누고 있다.
기차가 “빼액-”하는 기적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으며 전속력으로 저녁 어둠을 뚫고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면서 라흐마니노프의 장중하면서도 비감토록 서정적인 피아노협주곡 제2번의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이어 이번에는 다른 기차가 역시 전속력으로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려간다.
우연히 기차역에서 만난 두 유부녀와 유부남이 짧은 사랑 끝에 각자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는 고통스럽도록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영화 ‘짧은 만남’의 첫 장면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인데 나는 지금도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나뿐만 아니라 감독 데이빗 린(‘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과 린과 함께 각본을 쓴 로널드 님도 영화를 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영화는 오스카 감독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리는 기차는 의사 알렉 하비가 타야 할 기차이고 이와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기차는 가정주부 로라 제슨이 타야 할 기차다. 둘의 사랑은 이렇게 서로 기차 방향이 다르듯이 애당초 엇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대와 스크린 사상 가장 다재다능했던 영국의 극작가이자 각본가였던 노엘 카워드의 단막극 ‘스틸 라이프’(Still Life)가 원작인 이 영화는 불륜의 영화요 로라의 영화다. 평범한 여인 로라와 이상주의자인 알렉은 키스 이상의 행위는 저지르지 않지만 사회 규율로 볼 때 둘의 사랑은 불륜이요 비도덕적이다. 과연 둘의 키스를 간통으로 단죄해야 할 것인지 나로선 알 바 없으나 린은 이 불륜의 스릴과 고통과 부드러움을 흑백화면(후에 ‘제3의 사나이’로 오스카상을 탄 로버트 크라스커 촬영)에 시적으로 꽃을 피워냈다.
로라(실리아 존슨-이 역으로 오스카 주연상 후보)와 알렉은 해 저문 늦가을 목요일 저녁 작은 도시 밀포드의 기차역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다. 눈에 티가 들어가 불편해하는 로라에게 알렉이 다가가 손수건을 꺼내 로라의 눈에서 티를 빼내주면서 둘의 만남이 시작된다.
둘은 각기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를 둔 보통 사람들로 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무자비한 감정의 폭력행위가 일어나면서 둘은 짧은 만남의 날 동안 함께 기쁨과 슬픔을 혹독하게 치른다. 로라는 샤핑과 영화구경 그리고 알렉은 병원근무를 위해 매주 목요일 이 도시에 왔다가 일이 끝난 뒤 알렉은 하오 5시40분 발 열차로 먼저 떠나고 잠시 후 로라도 집으로 가는 열차를 탄다.
영화는 로라가 알렉과 마지막 작별을 나누고 귀가해 리빙룸에서 자기 건너편에 앉아 신문을 보는 무미건조하나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에게 속으로 자신의 짧은 만남을 고백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눈이 큰 로라는 모처럼 찾은 알렉과의 사랑에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도 사랑이라는 폭력적 행위가 일어날 줄은 몰랐다”며 로맨틱한 여학생처럼 희열하다가도 “우리가 서로를 자제할 수만 있다면”이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알렉의 말처럼 둘은 이미 이성을 찾기에는 늦어버렸다. 그래서 로라는 알렉이 헤어질 때 “목요일”이라고 하는 말에 “목요일”이라고 대답한다.
영화 ‘러브스토리’에서 올리버는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알렉은 기차를 타고 떠나는 로라에게 여러 번 “미안하다”고 말한다. “미안하오. 당신을 만난 것이 미안하오. 그리고 당신을 비참하게 만든 것이 미안하오.” 이 대사처럼 영화에는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아름답고 진실한 대사들이 많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둘이 처음 만난 카페에서 이별의 준비를 시작한다. 알렉이 로라에게 “이것이 우리 둘의 끝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는 아오. 그러나 아직은 채 아니 되오. 우리 서로 준비합시다. 갑작스런 이별은 우리에게 너무나 잔인하오”라고 당부하자 로라는 숨고만 싶은 얇은 미소를 지으며 “아직은 채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로라와 알렉의 시랑은 우리 모두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이런 사실성은 존슨과 하워드(‘제3의 사나이’)의 평범한 모습 때문에 더욱 절실한데 둘의 조용하고 절제된 연기가 한 치의 가식도 없어 우리는 두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웃다가 또 탄식하고 절망하게 된다.
로라와 알렉의 만남과 이별은 모두 기차역에서 일어난다. 린은 늘 이별이 머무적대는 안개가 자욱한 기차역과 함께 달리는 기차와 기적소리 그리고 엔진과 율동적인 바퀴소리를 절묘하게 효과적으로 사용, 로맨틱한 ‘기차역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영화 내내 흐르는 라흐마니노프의 밀려오는 파도의 무게처럼 서글픈 멜로디가 두 사람의 못 이룰 사랑을 애처롭게 동반하고 있다.
결혼한 사람들이 뒤늦게 찾은 참 사랑과 행복과 기쁨 그리고 그들이 행하고 견디어내야 하는 거짓과 죄의식과 수치와 비참함을 아름답고 고요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도록 통절하게 묘사한 황홀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Blu-Ray와 DVD가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오는 26일에 출시된다. 상영시간 8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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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