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는 이들에게 친절했던 미국인이 그립다. 송구스럽게 묻는 장소까지 안내해 주던 착한 이들은 이제는 눈을 마주칠 수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메시지 알리기도 어렵다. 귀에는 이어폰이 끼워 있거나 쉴새없이 텍스트로 누구랑 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필 여유를 잃었다. 바트 안의 남녀노소는 스마트폰에 시선이 붙어 버렸다. 묻지도 않았는데 노인 한 분이 바트 지도를 가리키며 스패니쉬로 반대 방향이라는 답을 준다. 걱정 담긴 배려에 비례해 스패니쉬 액센트는 더욱 커져 갔다. 그만이 남이 당황하는 표정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동안엔 음악을 듣고, 웃음을 쫓아 동영상을 보고, SNS 메시지에 실시간 응답하느라 옆 사람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일하며 듣고, 공부하며 듣고, 두 개의 컴퓨터로 작업을 동시에 하는 멀티 태스크에 멀티 윈도를 사용한다. 눈과 귀는 잠시도 쉬게 두지를 않는다.
뇌가 자유로이 생각의 길을 걷는 사색이라는 시간의 틈이 없다. 생각의 깊이는 없고, 이중 정보 처리에만 바쁜 우리의 브레인. 컴퓨터 속도가 빠를수록 인터넷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람들은 하루 살아내기가 힘이 부친다.
어느 장소에서나 무엇을 하거나 누구와도 접근이 가능한 만큼 응답의 의무가 생긴다. 하지만 자신이 바쁘게 쌓은 경험에서 얻는 귀한 메시지를 읽을 시간을 빼앗겨 버린다.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감성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듣기 어렵다.
자! 내게 주어진 일생이라는 시간에 내가 주체가 되는 주인공이면서 삶 전체를 보는 작업을 생각해 보자. 즉, 풀을 헤치며 숲을 거니는 나와 그 산 어느 길목을 가고 있는지 산 전체를 보고 있는 나.
길 끝 절벽에 도달하기 전에 목적지 어디쯤 와 있는지 점검을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일지 모른다. 조용히 명상에 잠겨보자. 스스로에게 원하는 삶과 목표를 물어보고 가치관에 공표, 가위표도 해 보고 맞게 잘 가면 칭찬도 해 주자.
든든한 자신감을 그날 그때 주워 담자. 나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옆 사람도 챙겨보자. 사건들 사이에서 따스한 감성을 건져내자. 어느 때 내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 그 실수로 인해 아파했을 이들도 좀 더 일찍 헤아려 보자. 잘못이 축적되지 않게 관리하며, 수정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잃지 말자. 답은 나를 읽을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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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