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지신명(知身命)

2016-02-25 (목) 04:04:48 양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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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말다툼은 주로 한가지 문제에서 시작되곤 하였다. 쓰레기 봉투 종량제가 되고부터는 더욱 잦아졌다. 모든 쓰레기는 봉투를 사서 버려야 하기 때문인데, 어머니는 무척 쓰레기 봉투를 아끼셨다. 사위며 아들 내외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의 이 행동을 말려줄 의원군을 구하는 볼멘 어머니 목소리는 호소라기보다 웅변이었다. 나도 창피한 적이 많았었다. 때론 맨손으로 깨진 병 조각을 줍고, 남의 차 후진을 도와주며 “오라이 오라이~” 하던 근사하지 않은 아버지가 못마땅해 왔으니깐...

우리가 살던 동네는 만리동 고개에 있는 학교 앞이었고 부설 야간 고등학교가 있었다. 골목이 많은 길엔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던 학생들로 담배꽁초와 개똥 그리고 거의 매일 누군가 술이 취해 토해낸 토물들이 발길에 밀리곤 했었다. 작은 골목길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아버지는 그걸 몰래 치우셨다. 마당 한구석에다 어디선가 주어 날른 모래를 쌓아놓고 작은 삽으로 떠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때로는 잠옷 바람으로 나가기도 했다. 나름 혼자 급한 걸음이었다. 주어다 놓은 깨진 술병 유리 조각 등은 어머니가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것이었다. 새벽에 살며시 일어나서 동네를 돌며 누가 볼세라 급히 치우곤 하였지만 쓰레기 봉투에서 모든 것은 드러나 버린다.

자식들이 심각성을 알고 치매검사를 받길 원했을 때 차분히 얘기해 주셨다.

“아버지는 늙어서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그러냐. 세상은 다 그런 것이여. 누군가 치우는 사람도 누구 잘못을 덮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이여. 그래, 난 눈이 어둡고 침침해서 더러운 게 자상히 보이질 않아요 그래도 늙으면 허리가 굽은께 내가 땅을 더 잘 보게 된다고.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러 가다가 그런 것 밟으면 쓰겄냐? 손바닥은 봐라 얼마나 두꺼운가! 더러운 것이 묻겠냐? 묻어도 탁탁 털어불면 되제. 또 냄새를 잘 못 맡아요.젊은 사람마냥 역겨운 냄새가 나면 못하제만…, 느그들은 이런 것 치우면 밥도 못 먹지만 아버지는 돌아서면 잊어버링께, 금방 밥도 더 잘 먹고 이렇게 돌아다님서 뭔가 해서 내가 건강한 거시여. 돈을 준다고 해도 젊은 사람은 못하는 일이여. 이런 건 나이든 사람 아니면 못하제. 나는 좋은 일 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쟎아. 그냥 하게 놔 둬라..”
몸이 명하는 걸 아신 분이셨다.

<양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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