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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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주 선교사의 VA 선교사 이야기2

2015-10-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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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품었던 노폭 제2장로교회


지난주에 소개한 레이놀즈 선교사는 한국인들에게 우리 말 성경책을 가져다주었고 평양 신학교에 머무르며 37년 동안 조직신학을 강론하였다. 한국 목사들의 의식구조에 신학과 교회론의 구조가 레이놀즈의 가르침 속에서 형성된 셈이다. 그가 조직신학을 강론할 때 사용한 교재로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챨스 핫지와 중국인 목사 가옥명의 신도론(神道論)이다. 1937년 레이놀즈가 조선에서 4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은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조직신학을 강론 한 이가 남장로교 선교사인 구례인(Crane)이다.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한 남부 사람들이 한국 신학의 중심을 잡아 나간 것은 한편으로 축복에 속한다. 이처럼 한 선교사가 현장에서 이토록 큰 역할을 한 것은 그가 소속한 선교단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현장에 있는 동안 물질 적으로, 기도로 협력한 파송교회의 몫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레이놀즈를 조선으로 파송했던 노폭 시의 제2장로교회는 아펜젤러를 파송한 볼티모어의 러브레인 교회처럼 하늘의 별과 같이 큰 몫을 감당한 셈이다. 러브레인 교회의 가우쳐 목사가 기차 안에서 고종이 파견한 보빙 사절단을 만나 조선의 형편에 대해 듣고 도울 마음을 가졌던 작은 소원이 한국에 그토록 수많은 감리교회가 태동되는 큰 결실을 맺었다. 하물며 노폭 제2장로교회는 레이놀즈 부부 외에도 윌리엄 불 부부, 그리고 불의 누이인 마가렛까지 모두 다섯 명의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였다. 큰 교회도 아닌 처지에 그야말로 미지의 나라 조선을 입양한 것이다. 그리고 노폭 제1장로교회의 닥터 밴스(Vance) 목사 역시 레이놀즈와 같은 유니언 신학교 급우였던 윌리엄 전킨이 조선으로 파송될 수 있도록 그를 지원하였다. 이래저래 노폭 제 1, 제2장로교회는 우리나라 선교와 깊은 인연을 맺은 셈이다.
“나의 어릴 적 기억중의 하나는 노폭 버지니아 제2장로교회의 기둥이고 훌륭한 장로였던 경건한 당신의 아버지 W. D. 레이놀즈에 관한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저는 태어났고 주님께 헌신했으며 당신의 아버지는 주일학교와 교회와 회중들의 곳곳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빌리 레이놀즈”는 나의 두 형 넬리와 그리핀의 놀이동무로 제가 꼬마 적부터 우리 집에서 늘 회자되는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1899년에 한국의 선교사로 올 것을 결정하고 여러 구상을 할 때에 가장 유쾌하게 다가왔던 생각은 이미 한국으로 8년 전에 파송되어서 선교부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있는 빌리 레이놀즈를 만나서 함께 사역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글은 레이놀즈가 1937년에 45년간에 걸친 조선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할 때 군산에서 사역하던 윌리엄 불이 레이놀즈에게 바친 글이다. 그는 레이놀즈와 같은 노포크 제2장로교회에서 태어났고 레이놀즈의 누이에게서 성경을 배웠다. 그가 목사가 되고 선교사로 지원하고자 했을 때 그의 가정과 교회 식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불은 레이놀즈가 있는 조선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한 교회 지체로 공동의 운명처럼 엮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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