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주 선교사의 VA 선교사 이야기❶
2015-10-13 (화)
구한말부터 1세기 동안 한국에 와 복음을 전한 미국 선교사들의 삶과 업적을 연구하고 있는 양국주 선교사(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대표)가 버지니아주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본보에 연재한다. 몇 년 전부터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미국 선교사들의 자료를 직접 찾아내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필체로 인물전을 집필하고 있는 양 선교사는 특별히 버지니아주 출신 선교사들에 초점을 맞춰 한국교회에 끼친 미국 교회의 선교적 기여와 그 의미를 정리한다. 양 선교사는 이미 ‘선교학 개론-평양에서 전주까지’,‘서서평 평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등 다수의 미국 선교사 열전을 펴내 큰 관심을 끌었고 본보에 연재되는 버지니아 출신 선교사들의 숨은 이야기들도 큰 관심을 끌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청년기독실업인회 회장, 이스라엘문화원 원장을 지냈고 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C) 부의장으로 있는 양 선교사는 현장과 이론을 아우르는 해박한 선교학 강의로 한국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편집자 주>
조선에 축복을 가져온 VA 사람들
언어 천재 레이놀즈의 조선 사랑
버지니아는 자신들이 누려온 축복으로 일찍이 조선의 근대화와 기독교 개화에 뿌리 깊게 공헌을 했다. 앞으로 3개월 동안 독자들은 버지니아 사람들이 조선에 가져다 준 놀라운 축복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다.
특히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언 신학교와 햄든 시드니 대학에서 공부한 영재들의 조선행은 놀라운 결실을 맺었다. 원래 햄든 시드니 대학은 아이리시-스코틀랜드 사람들이 후손들을 위해 남학생만을 받아들이는 장로교 학교로 문을 열었다. 버지니아 초대 주지사인 패트릭 헨리와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인 위더스푼이 협력하여 1777년에 세웠으니 어느덧 238년의 역사를 가진 대학이다.
유니언 신학교는 1812년에, VCU는 1838년에 햄든 시드니 대학의 신학부와 의과대학으로 시작되었다. 유니언은 1898년에 햄든 시드니에서 현재의 리치몬드로 옮겨오면서 독립했다. 그러나 햄든 시드니 대학의 도서관 옆에는 아직도 로버트 댑니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니언 신학자들의 무덤이 있다. 유니언에서 신학을 마치고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가 자그마치 95명이나 된다. 단일 학교 출신으로 최고의 신학교이다.
1908년에 햄든 시드니 대학이 세워진지 131년 만에 최초의 명예 신학박사 학위가 윌리엄 레이놀즈(사진 오른쪽)에게 주어졌다. 윌리엄 레이놀즈는 1887년에 햄든 시드니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문학사와 예술사의 두 가지 학위를 취득했고, 라틴어와 헬라어와 불어와 독일어의 4대 언어과정을 수료하였다. 재학하는 동안 모든 전공과목에서 그가 받은 평균점수가 96.5점이었다. 졸업식에서 그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라틴어로 졸업사를 하였다. 그에게는 1925년에 법학박사 학위도 주어졌다. 그에게 주어진 신학박사의 명예는 그가 조선말로 번역한 성경번역의 공로 때문이다.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그는 담임목사로 일하던 전주 서문교회에서 영국 성서공회 총무인 릿손에게 조선말로 “Punyuk ta toiesso(번역 다됐소)” 라는 전문을 보냈다.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구약 38권을 5년5개월 16일 만에 마친 날이었다. 고린도 전후서 두 권을 더해 66권의 한국어 성경 가운데 40권이 그의 손으로 번역되었다.
언어의 천재 레이놀즈의 한국 이름은 ‘이눌서’라고 불렀다. 전주와 평양에서 일한 그는 스스로를 전주 이씨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가 유니언 신학에 다니던 1890년 12월 28일 주일 밤 10시, 조용히 기도하던 중 일 년 전부터 성령의 인도를 간구하며 열정적으로 미래 자신의 삶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결단하게 되었다.
내슈빌 집회에서 언더우드에게서 도전을 받고 리치몬드 출신의 아내를 만나 그가 조선으로 옮겨온 때가 1892년 11월 4일이었다. 그의 탁월한 언어실력은 아펜젤러와의 성경번역에서 두드러졌다. 그가 성경번역위원이 된 1895년, 아펜젤러는 그에게 “당신은 조선에 온지 얼마 되지 않으니 조랑말처럼 뛰어다니며 선배들이 하는 번역이나 눈여겨보라”며 아무런 일거리도 맡기지 않았다. 아펜젤러가 마태복음서를 번역하고 위원들이 공동으로 심사하는 독회로 모였을 때 그는 아펜젤러의 번역상의 오류를 세심하게 꼬집었다. 이미 조선에 입국한지 10년이나 된 선배 아펜젤러의 번역상의 오류를 지적할 만큼 그의 언어 실력은 언더우드와 게일을 감동시켰다.
윌리엄 레이놀즈는 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시절 총회장을 역임했고 은퇴하던 1937년까지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토종 버지니아 사람 윌리엄 레이놀즈가 조선에 와서 섬겼던 45년 동안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선교의 결실로 맺었던 200명의 세례 교인이 더 늘어나 그가 은퇴하던 1937년에는 125,225명이었다. 길선주와 이기풍, 서경조와 김익두, 박윤선에 이르기까지 오고 오는 한국교회의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이 그의 가르침 속에 성장했다. 1951년 불랙 마운튼에서 죽은 그는 어린 시절 뛰어놀던 버지니아 주 놀폭시 엘름우드 묘지에 아무런 비석도 없이 외롭게 홀로 있다. 위대한 ‘한국 신학의 아버지’를 기리는 스테인드 글래스(사진 위)가 그가 다니던 놀폭 제2 장로교회 정면에 설치되었고 유니언 신학교 도서관에 레이놀즈 홀이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