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교회, 새로운 사명 찾아야”
2015-09-04 (금)
지난 7월 설립 50주년을 맞은 워싱턴한인장로교회는 워싱턴 지역에서 세 번째로 역사가 깊은 한인교회다. 설립자 가운데 한명은 강경옥 장로. 하워드대 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강웅조 박사의 부친이다. 목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개신교회에서 장로가 리더 역할을 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강 박사는 1984년 하워드대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장로교회서 안수를 받은 목사다. 교회사, 실천신학 등을 가르치는 교수로 반평생을 보냈다. 정치를 하다 5.16 이후 신학공부를 한 뒤 교회까지 세운 부친을 비롯한 가족의 영향 탓이라고 볼 수 있다. 부친은 귀국해 ‘경찰선교회원회’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후 ‘경목’의 모태가 됐다. 그 분은 제주복음교회도 세웠고 신학교도 운영했다.
“미주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 교회의 역할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1961년 4월 당시 문교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에 와 지금까지 한인교회들을 안팎에서 지켜본 강 박사는 이렇게 평했다. 자신처럼 유학생 200-300여명이 전부이던 60년대 초와 지금의 한인 교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발전됐다. 믿음을 공유하는 신앙인들이 교제하고 예배하던 것이 전부이던 교회는 60년대 말 이후 이민자들이 폭증하면서 사회봉사센터 기능을 많이 했다. 갓 이민온 한인들의 통역, 운전, 직업 알선을 돕는 일은 교회, 특히 목회자의 주임무였다. 베트남전 종전 후에도 한인 이민자들이 크게 늘었는데 이들은 주로 ‘켄트 빌리지’에 몰려 살았다.
조국을 보는 시각도 세월이 흐르면서 크게 변화를 겪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은 군사 정권이 들어서 있었고 한인 이민자들의 열망도 ‘조국의 민주화’에 집중됐다.
“제 유학 초기에는 향우회가 없었어요. 지역 갈등 문제도 당연히 없었죠. 박정희 대통령이 들어서고 이후 광주 항쟁이 발생한 후 호남향우회가 생기고 그러더니 향우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더군요.”
반면 한인교회들은 숫적 증가와 함께 안정기로 접어드는 듯했다. 교회들은 내부에 집중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해외 선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과다한 경쟁과 과시성 사역이 되면서 부작용이 없지 않았다고 강 박사는 보고 있다. 옳은 일이었고 쏟아 부은 물질도 많았지만 치밀하고 장기적인 전략이 부족했고 큰 그림을 못 본 탓에 결과는 아쉬움이 많다는 분석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미주 한인들의 의식 구조, 한인 이민사회 안에서 여전히 비중있는 중심축을 형성하는 교회의 위상과 역할은 어떻게 변화돼야 할까 물었다.
“한인 커뮤니티는 이제 1.5세, 나아가 2세들이 전면에 나서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스럽게 리더십이 세대 계승을 해야죠. 다만 교회는 세대 간 대화와 각 이해 집단의 융화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더 충실히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민 연륜이 깊어지면서 교회의 사역이 확대됐듯이 이젠 교회가 남북 통일 문제, 미국 주류사회 안에서의 한인 커뮤니티의 미래 등 ‘거대담론’을 주도해가는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것도 강 박사의 바램이다. 동성애 등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는 미국교회를 향해 온전히 빛을 바라고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는 역할도 한인교회의 사명이라고 강 박사는 믿는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한인교회의 선교사 파송이 가장 많다고 하죠? 급격한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다시 선교지로 바뀌고 있는 미국 안에서 한인교회는 새로운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의 중재자로 살아온 원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병한 기자>
강웅조 박사는
서울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56학번으로 입학했다. 군생활을 하는 도중 메릴랜드대학 분교를 정치학 전공으로 졸업했고 1961년 문교부 유학생으로 선발돼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1980년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하워드대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했다. 2003년 워싱턴지역 한인사 편찬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버지니아크리스찬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박사 논문은 ‘슈펠트 협상에서 한국의 국제적 정체성 찾기’란 제목으로 2005년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