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을 시작으로 크리스마스, 새해 등 “감사”라는 단어가 집중적으로 회자되는 때가 되었다. 사실 감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빈도만큼 감사하는 생활이 일반화되어 있다거나, 목마를 때 물 마시고 졸리면 자게 되는 것처럼 특별한 의식의 흐름없이 본능적으로 감사하고 살 수 있다면 감사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강조되고 조명받지는 못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다수가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고 있고 감사하는 삶이 보편적인 삶의 형태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감사하며 사는 것이 왜 이리 쉽지 않은 것인지 생각해보면 원인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특권의식이 한 가지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바라보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또 다른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사소한 것들을 말 그대로 사소하게만 보고 지나치는 무덤덤함을 또 다른 원인으로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인을 제거하여 즉, 특권의식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보다는 내 삶에 집중하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각을 길러내면 감사하며 사는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적어도 이론상은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감사하며 사는 삶은 위와 같이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
이쯤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감사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음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흔히 감사에 대해 생각할 때, 감사를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갓난아이라도 태어나자마자 표현할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탑재되어 있는 감정과 감사를 동일시하고, 감사 역시 이런 감정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사는 상황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대한 개인의 선택이고 훈련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감사하는 상황이 생겼기 때문에 감사한다기보다는 상황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 감사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표현하는 감정들이 내재적이고 생득적인 것이라면, 감사는 커가면서 알게 되고 연습을 통해 강화되어 가는 가치라고 보는 편이 옳다.
결국에는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훈련없이는, 즉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감사는 자연스럽게 아무노력없이 얻어지는 공기같다기보다는, 추울 때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과 같은 것이다.
불을 만들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내가 따뜻해질 수 있는 것처럼, 감사하는 삶을 사는 노력을 해야만 감사를 통해 풍요로워지는 삶을 경험할 수 있다. 노력이 힘들고 수고스럽겠지만 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내가 절망적인 순간에 있을 때 나의 시선을 절망에서부터 희망으로까지 옮겨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고, 내가 일상적인 순간에 있을 때는 내 삶을 갑절로 풍요롭게 해주는 가치이며, 내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내 삶을 넘어서는 나눔을 가능하게 해주는 창구이다.
감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때가 되었다. 매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 감사하다. 시간과 노력이 더해질수록 좀더 나은 선택을 하며 삶을 살아가게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