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간신문에 오늘따라 눈에 띄는 사진 두 장이 있다. 시상대에 선 어느 선수의 활짝 웃는 얼굴 바로 아래로 지진에 가족과 집을 잃고 절규하는 한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좁은 여백을 사이에 두고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보며 느닷없이 이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잘 될 때는 생각도 안 하다가 어려울 때 무심한 이웃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나?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성경 구절처럼 좋은 날에 맘껏 즐거워하고 힘들 때는 지나온 날들도 돌아보며 인내해야겠지만, 축하 받으면 기쁨이 배가되고 함께 울어주면 더 힘이 될 것이다.
한국인의 ‘정(情)’은 서로 돕는 공동체 의식으로 고달픈 세상살이에 윤활유가 되어왔다. 언제부터 자기 가족의 이익만 챙기는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게 된 것일까?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지만 아직도 전세비를 못 내어 자살할 만큼 절대 빈곤에 고통 받는 사람도 있고 상대적 빈곤감에 위축되기도 한다.
내 자녀가 잘 되는 일이라면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의식은 경쟁논리에 찌든 우리의 자화상인 것 같다. ‘배워서 남 주나’라며 자녀에게 출세지향적 학업을 강권하던 부모세대, 산업화 시대에 배움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들의 염원을 탓할 수만은 없고 그 교육열이 오늘날 한국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배워서 남 주라’고 가르치면 좋겠다. 계산하지 않은 진심이 큰 행운을 몰고 온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책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할 때 뜻밖의 선물처럼 되돌아오는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자녀의 삶을 기대해 보자. 최소한, 출세가도를 달리던 자녀가 사리사욕으로 부끄럽게 몰락하는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다.
묵묵히 봉사단체의 일원으로, 결손가정 아이와의 정기적 만남으로, 매월 보내는 작은 기부금으로도 이웃을 돌보는 분들이 있어 세상이 그래도 따뜻하다. 홀로 되신 노인 한 분께 몇 주째 안부 전화도 드리지 못한 생각이 들어 전화기를 든다.
성실하게 시간제 일을 하더니 마침내 원하던 회사에 입사한다는 청년에게 축하 메세지도 보내줘야겠다. 사건 사고 뉴스로 일그러진 신문이 미담(美談)으로 춤추는 활자들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