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영어 속담에 ‘남의 신발을 신어 보라’는 말이 있다. 속담이 의미하는 대로 내 발에 맞지도 않고 고린내까지 텁텁이 배어 있는 남의 신발을 신는다고 과연 그 사람의 입장이 내게 전해질까? 혹은 남의 안경은 어떤가? 내 시력과 상관도 없는 남의 안경을 써 본다면? ‘체면’이라는 안경 말이다.
그것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래 ‘체면 지키기’란 나의 분수를 지키는 가운데 가장 나다운 모습을 찾아내는 심리적 과정이다.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이미지의 자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의 얼굴, 즉 체면이다. 결국 체면 지키기는 남의 안경을 쓰고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분수지키기이며 나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다.
‘나’는 네 가지의 국면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첫째,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의 특성, 둘째, 나는 모르지만 남에게 보여지는 나, 셋째, 나만 알고 남은 모르는 나의 감추어진 모습, 넷째, 나마저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창조주만이 아신다 치고 다른 사람과 진정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첫번째 영역이 ‘나’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건강한 자아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체면’이라는 안경을 쓰고 나 자신에게 무리와 위선을 안겨주면서까지 보여지는 나의 모습에 집중해 온 것은 아닐까?
옷, 차, 집---. 우리가 흔히 나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믿는 것들 때문에 말이다. 우리의 아이들마저 그렇게 길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 디자인된 계획 하에 아이들이 만들어져 가는 것은 아닐까? 부모와 가족, 학교와 사회가 원하는 틀에 맞추어 마름질되어 가봉되고 완성되어진 옷을 아이들에게 덧입히는 것은 아닐까?
팔도 구겨넣고 머리도 구겨넣고 작아서 아프다고 울면 징징거린다고 벌을 세우며---. 도토리는 당연히 떡갈나무가 된다. 떡갈나무가 될 아이가 오동나무가 되고 옻나무가 되어가야 한다니---. 김춘수님의 싯구절을 읊조린다. 과연 나의 성장기에 나를 이렇게 불러준 사람이나 있었던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의 그 이름이 불려지지 못한 채, 또 내 아이들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불렀던 것 같다. 빛깔과 향기는 아랑곳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