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이윤선 ㅣ 아, 봄날은 간다

2014-05-28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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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벗어야만 한다. 갖고 있는 물병을 버려야만 한다. 벌거벗은 것처럼 몸을 비추어야만 한다. 때로는 몸 구석구석 샅샅이 훑어져야만 한다. 극도의 수치심이 스멀거리기도 한다. 언제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게 되는가? 비행기를 탈 때이다. 사람이 사람을 저버린 세상이다. 믿음은 강제력에 갇혀 힘을 발하지 못한다. 아무리 내가 선한 사람이어도 혹은 나에게 전혀 남을 해할 의사가 없을 지라도 의심받아 마땅한 자 혹은 잠재적 위험군에 끼여 사전 예방이라 이름 붙여진 강제력에 복종해야만 한다.

게다가 머리에 터번을 두르거나 피부색이 검고 턱수염이 있다면 세계의 공항 곳곳에서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도 있다. 그런 얼굴이 아니라면 늘 선량한 지구촌인으로 대접받을까? 혹은 같은 머리 색깔과 그저 엇비슷한 얼굴들이 같은 말을 쓰며 사는 그 땅에서는 모두가 이웃사촌이라 오손 도손 사랑으로 다독여댈까? 사람이 사랑이라며 하트를 그리며 미소 짓는다. 건널목을 조심성 없이 건너려는 배달원의 위험한 순간을 구해준다. 그 시민의 작은 사랑의 손길을 본이가 한 아기엄마를 도와 버스에서 유모차를 내려준다. 또 지켜본 이는 키 작은 이가 버둥대며 높은 데서 물건을 내리려 애씀을 도와 내려준다. 또 지켜본 이가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

아이들이 갖고 놀던 공이 도로로 굴러가지 않게 막아주고 공항의 짐 찾는 곳에서 노인의 짐 가방을 들어준다. 무거운 짐을 가진 이를 위해 건물의 문을 열어 붙잡아 주고 코인런드리(빨래방)에서 드라이어에 빠뜨리고 간 빨래를 챙겨 불러준다. 사랑의 체인이다. 보험회사들의 광고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존엄성을 보여주려 애쓴다. 우리는 때때로 작은 손을 내밀어 돕는 손으로 기쁘고 즐겁게 강강술래를 돌기도 한다. 하지만 맨발로 차갑고 더러운 바닥을 걸을 때와 머신이 360도 사정없이 나신을 핥는 그때에 친구는, 사람은 원수가 되어 버린다. 미처 길도 떠나지 못했건만 새까매진 발바닥에 신발을 꿰어 신으며 우리는 안다. 아, 잔인한 4월이 지나도 우리는 온몸을 부비며 여전히 부둥켜안지 못했음을. 그래도 봄날은 간다. 아니, 그러기에 봄날이 가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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